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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끼오 : 마흔넷에 한국 떠난 직장인, 베를린 치맥 전도사 된 이유

한이룸
이커머스
2025. 8. 6.
안정아 꼬끼오 대표
꼬끼오를 만들기 전까지 저는 20년간 7곳의 회사에 다녔어요. 주로 했던 업무는 마케팅. 물건과 서비스를 파는 일이었죠. 창업 직전 마지막 4년은 해외 기업의 한국 지사장으로 일했고요.
40대 중반이 되면서 저는 저만의 브랜드를 열었습니다. 그게 꼬끼오예요. 그럼 많이들 물어보세요. 해본 적도 없는 창업을 왜 베를린까지 가서 했느냐고요.
그 이유는 제가 살아온 궤적을 통해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그동안 저는 늘 새로운 환경에 나를 던지면서 도전해 왔거든요.
Chapter 1.해외 동경한 말괄량이, 마케팅으로 세상을 배우다
1973년 서울에서 태어난 저는 맞벌이하는 부모님 아래에서 자랐어요. 자유시간이 많았습니다. 놀이터와 오락실, 도서관을 끌리는 대로 돌아다니는 게 제 일이었어요. 동네에선 말괄량이라 불리곤 했죠.
그런 제 마음에 ‘외국’이 훅 들어온 건 고등학교 1학년 때입니다. 홍콩의 영화배우 장국영*에게 빠진 게 계기였어요. 저는 영어로 인터뷰하는 장국영의 모습에 유독 끌렸어요. 언젠가 그를 만나서 대화하겠다는 마음으로 영어를 공부했습니다.
홍콩 대표 배우. 영화 「영웅본색」, 「아비정전」 등으로 국내에 많은 팬을 뒀다. 2003년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장국영으로 시작된 해외를 향한 동경은, 1994년 22살의 배낭여행으로 이어졌어요. 당시에는 여성이 혼자 해외여행을 하는 건 드문 일이었습니다. 해외여행 자유화(1989년)가 된 지 5년밖에 안 됐을 때였거든요. 그래도 저는 다른 세상이 궁금해 태국과 말레이시아, 홍콩과 싱가포르로 떠났죠.
해외를 다닌 경험은 제 진로에도 영향을 줬습니다. 1998년, 외국계 기업인 P&G가 첫 직장이 됐거든요. 영어에 빠진 제게 외국 기업은 딱 맞았죠.
그중에서도 사람들과 협업하는 일이 많고, 판매 메시지를 던지는 마케팅은 더더욱 맞았어요. 처음엔 출산휴가를 떠난 직원의 빈 자리를 채우는 단기 계약직이었지만, 머잖아 정규직 제안을 받았어요. 사내의 모든 강연을 찾아 듣고 끈질기게 질문하는 모습을 봐주신 덕에, 5년 넘게 회사를 다녔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마케팅 직무를 중심으로 15년간 5곳의 회사를 유랑했습니다. 마치 여행하듯 말이죠. 한 회사에서 일을 배우고 자리 잡았을 즈음, 새로운 기회가 열리면 그곳에 뛰어들었어요. 영화 제작·배급사도 경험했고, 패션 매거진 엘르ELLE에선 마케터로 5년을 일하는 식이었습니다.
특히 엘르에서 저는 ‘브랜드의 값’을 배웠어요. 패션은 생활용품과 문법이 다르더군요. P&G 샴푸가 2000원이면, 원가는 800원이었어요. 이익을 두 배 정도 남기면 성공이라 했죠. 하지만 패션 스카프는 원가의 8~10배를 남기는 구조였습니다. 로고와 디자이너의 가치로 설득되는 시장이었죠.
이렇게 브랜딩의 힘을 배운 뒤부턴 제 관심 분야 마케팅에 집중했어요. 2009년부터 3년간 맥주 브랜드 하이네켄에서 일했습니다. 이후에는 CJ E&M에서도 일하며 콘텐츠 사업을 배웠고요.

베를린 거리에 선 안정아 꼬끼오 대표. 그는 배낭여행을 계기로 세계를 경험한 뒤, P&G·엘르·하이네켄 등 외국계 기업에서 커리어를 쌓았다. ⓒ안정아
Chapter 2.초보 지사장, 사람들과 힘 합치는 법을 익히다
15년을 일하고 나니, 한편으로 걱정이 들었습니다. 마케팅에 커리어를 바칠수록, ‘평생 여기서 일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새로운 채널과 SNS 트렌드를 따라잡는 게 부담됐습니다.
때마침 기회가 열렸어요. 바로 ‘경영’이었습니다. 2011년, 미국의 생활가전 브랜드 콘에어Conair*가 한국 지사를 세우면서 지사장직을 제안한 거예요. 엘르에서 일할 때 콘에어 신제품 마케팅 지원을 해서 인연을 맺은 게 계기였어요.
1959년에 시작된 미국 생활가전 브랜드로 120개국에 진출했다. 국내에는 바비리스, 비달사순, 쿠진아트 등의 가전제품을 유통 판매 중이다.
물론 어려운 자리였습니다. 경영은 해본 적 없었으니까요. 그래도 마흔이 된 제게 돌파구가 될 거라 믿었습니다. 이전에도 그랬듯, 부딪쳐 보는 쪽을 택했어요.
그렇게 시작한 지사장 일, 어땠을까요? 좌충우돌의 연속이었습니다. 한 부서를 맡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일이더군요. 마케팅팀의 시선이 아닌, 전체 기업과 부서의 입장을 헤아려야만 했거든요.
특히 갈등 조율이 어려웠습니다. 실적이 부진할 때 영업팀은 ‘마케팅 지원이 부족했다’고 했고, 마케팅팀은 ‘영업의 현장 설득이 미숙했다’고 주장했어요. 실적이 좋을 때도 갈등이 있었습니다. 영업팀은 ‘우리가 거래처와 소통을 잘해서’, 마케팅팀은 ‘홍보를 잘해서’라고 했거든요.
제가 여기서 먼저 할 일은 딱 하나라 생각했습니다. 부서 이기주의를 타파하는 것. 그래서 ‘한 배를 탈 수밖에 없는 시스템’을 만들었죠.
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 문제가 터지면 각 팀에 개선점과 이를 해결할 아이디어 3가지를 준비해 미팅에 오게 했어요. 작은 지시지만, 이것만으로도 비난이 줄었습니다. 각자 떠올린 해결책을 논의하는 동료가 됐죠.
리더들의 알력 싸움을 막을 자리도 마련했어요. 속을 터놓을 수 있도록 소수로 만나 삼겹살을 먹는 분위기를 만들었고, 본사 흉을 들어주기도 했어요. ‘우리는 같은 팀’이라는 믿음을 주기 위해서였죠.
마음을 모으고 나니 실적을 올리는 건 쉬운 편이었어요. 제 전공인 마케팅 역량을 발휘할 수 있었거든요.
대표적으로 성공한 게 고데기*, ‘미라컬Miracurl’ 판매였습니다. 머리의 변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매체가 뭘까 고민하다가 홈쇼핑에 제품을 띄웠어요. 예상대로 반응이 올라왔습니다. 미국 본사를 제외하고 세계 지사 중 판매 1등을 찍었죠.
전기 머리 다림기. 고데기는 일본식 표현이지만 대중적으로 쓰이고 있어 본문에 사용했다.
하지만 신나게 일하는 것도 4년을 넘기지 못했어요. ‘지사장도 월급쟁이’라는 걸 깨달은 계기가 있었거든요. 한동안 오르던 매출이 주춤하자, 본사의 인원 감축 지시가 내려왔어요. “제품이 늘 잘 팔릴 수 없다”며 설명해도, 명령은 바뀌지 않았죠.
2016년 2월, 저는 회사를 떠나기로 했어요. 이때만 해도 아무 대책도 없었습니다.

콘에어에서 신제품 매출 1위를 기록한 후, 미국 본사에 전략 발표용 PPT를 준비 중인 안 대표. 하지만 그해 “이제는 나의 것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경영 일선에서 내려왔다. ⓒ안정아
Chapter 3.40대 중반 퇴사자, ‘베를린 치킨집’을 꿈꾸다
제가 베를린에 발을 디딘 건 2016년 6월 여름이었습니다. 마흔넷이 됐을 때였죠. 그전까지 독일에 가본 적은 없었어요. 언어를 할 줄 몰랐던 건 물론, 치킨집을 생각하지도 않았죠. 해외에서 딱 1년간 살길을 찾아보자는 생각이 전부였습니다.
연고도 없는 나라에 간 이유가 있습니다. 한국에선 새로운 도전을 하기가 두려웠거든요. “지사장 그만두고 뭐할 거냐”와 같은 말이 저를 따라다니는 것 같았어요. 직장 생활은 더 하고 싶지 않았고, 내 것을 만들 아이디어도 없었어요.
그래서 택한 게 베를린이었습니다. 가깝게 지낸 친구가 베를린에 대한 책을 쓴 여행 작가*였거든요. 그의 소개로 독일 아티스트들을 만난 적도 있었습니다. 하나 같이 진중한 멋이 있더군요. 그렇게 베를린은 제게 한번은 가보고 싶은 도시가 됐습니다.
이동미 여행 작가. 『다시 베를린』, 『방콕, 싱가포르 홀리데이』, 『이태원 프리덤』등을 출간했다.
이쯤이면 치킨집을 떠올릴 법도 하잖아요? 하지만 전 베를린에서도 한동안 방황했습니다. 창업 준비는커녕 이력서를 품고 다녔어요. 영어로 일할 수 있는 마케터 공고에 전부 지원했습니다. 3개월간 80곳에 원서를 넣었어요. 불안해서 ‘믿을 구석’을 만들어 놓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아무 곳에서도 부름을 받지 못했어요. 회신한 곳도 “미안하지만 당신의 경력이 너무 좋다”며 거절했죠. 그들에게 저는 독일어도 못하고, 비자도 없는 외지인에 불과했습니다.
치킨집이 떠오른 건 그때였어요. 3개월 내내 거절만 당하자, 한국에서 치킨에 맥주를 먹던 시절이 떠오르더군요. 하지만 베를린 어디에도 한국식 치킨을 파는 곳이 없었어요. 그때 생각했습니다.
“그냥 내가 치맥을 들여올까?”
짠맛의 튀긴 음식이 익숙한 독일인에게 치킨은 매력적일 거라고 봤습니다. 매콤달콤한 양념까지 더하면 승산이 있어 보였죠. 제가 한국인이란 것도 경쟁력이 될 것 같았고요.
그렇게 2017년 1월, 저는 치킨집 창업이라는 새로운 도전에 스스로를 내던졌습니다.

꼬끼오의 대표 메뉴 치킨과 골뱅이무침. 안 대표는 베를린에 한국식 치맥 문화를 전하기 위해 20개월 넘는 준비를 시작했다. ⓒ꼬끼오
20개월 : 독일의 창업 장벽을 뚫기까지
먼저 한 일은 ‘치킨 만드는 법 배우기’였어요. 한국엔 3일 만에 치킨의 모든 것을 가르쳐주는 학원이 있더군요. 600만원을 내고 조리법과 비법 양념 레시피는 물론, 기계를 다루는 법까지 익혔어요.
돌이켜 보면, 음식 만드는 건 그나마 쉬운 일이어요. 문제는 그다음이었습니다. 규제가 빡빡한 독일에서 식당 여는 일이 만만치 않았거든요. 언어 장벽은 물론, 비자와 계약, 요식업 허가까지 모든 게 다 새로웠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 사업 비자를 얻으려면, 30페이지에 달하는 계획 문서를 내야 했습니다. 향후 5년 수익을 예상하는 재무 표와 함께 인력 채용 및 자금 조달 계획, 독일에서 치킨집을 해야 하는 이유까지 써야 했죠. 다 채우기까지 무려 8개월을 들여야 했어요.
하지만 벽에 맞닥뜨리니 오히려 오기가 생기더군요. 특히 ‘왜 독일에서 치킨집을 해야 하느냐’는 질문을 보자 저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시작도 못 해보고 한국에 돌아갈 수 없다”
쉽지는 않았습니다. 베를린의 건물주들은 ‘외국인은 불안하다’며 임대를 거부했어요. 간신히 자리를 잡은 뒤에는 현지인도 ‘까다롭다’고 한 설비 기준을 맞추려 관청을 수없이 드나들었죠. 환풍 시스템과 천장 마감, 상하수도의 기름을 걸러내는 장치까지. 모두 합격을 받은 뒤에야 오픈 허가를 받았습니다.
버거운 시간이었지만, 이때 저는 자신을 믿는 법을 배웠어요. 그전까지 저는 ‘지사장님’으로 불린 것에 사로잡혀있었어요. 타지에서 환대받기 어려워지고 나니, ‘이제 믿을 건 나밖에 없다’며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죠. 자립하는 법을 비로소 배웠던 거예요.

2018년 10월, 꼬끼오 오픈 당일. 매장 앞에 길게 줄을 선 손님들의 모습. ⓒ안정아
Chapter 4.맛은 밀어붙여도 된다, 그들의 문화를 안다면
2018년 10월 26일. 꼬끼오의 문을 처음 연 날짜입니다. 사실 오픈일을 세 번이나 미뤘어요. 6월 예정이었던 오픈일이 4개월이나 밀렸죠. 오히려 뜸을 들인 덕이었을까요. 오픈하자마자 줄이 늘어섰습니다.
비결은 대단한 데 있지 않아요. 맛만큼은 확실한 우리의 치킨을, 독일의 식문화에 맞게 전하는 데 집중한 게 전부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제가 잡은 꼬끼오의 컨셉은 다음과 같았어요.
‘밥과 술이 함께하는 저녁 문화 공간.’
당연한 말 같지만 우리 정서와는 조금 다릅니다. 우리는 치킨집을 식사 후에 가는 2차 공간으로 떠올리곤 하잖아요? 독일은 그렇지 않았어요.
독일 현지인들은 식사 때 술을 많이 마시지 않습니다. 맥주를 많이 마신다고 알려졌지만, 막상 맥줏집에선 안주 없이 맥주만 들이켜는 식이에요. 그래서 맥주 맛이 다양하죠. 한국처럼 삼겹살에 소주, 파전에 막걸리처럼 술과 음식을 연결하는 문화가 아닌 거예요.
치킨집을 옮겨온다고 했을 때, 우리의 환경을 그대로 옮기면 안 된다고 봤습니다. 현지인을 위한 설계가 필요했어요. 이때 제가 떠올린 방법은 ‘음식은 한국식, 전달은 독일식’이었습니다.
우선 음식은 철저하게 한국 입맛에 맞게 만들었어요. 그만큼 맛에 자신이 있었거든요.
대표적으로 뼈치킨을 들 수 있습니다. 사실 유럽인들은 닭고기를 먹을 때 90% 넘게 순살을 먹어요. 하지만 저희는 뼈치킨 옵션을 일부러 넣었습니다. 그러자 ‘여긴 진짜 한국식’이라며 한국인도 인정하는 집으로 소문이 났고요.
유럽인들에게 생소한 치킨무도 냈습니다. 현지인 고객 10명 중 4명 정도는 신맛을 어색해 하지만 치킨과 무를 함께 먹었을 때의 풍미를 느끼게 했어요. 그렇게 우리 맛에 녹아들게 했습니다.
치킨의 바삭한 식감도 지키려 했어요. 다른 식당을 다녀보니, 사람들이 눅눅한 치킨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봤거든요. 우리는 이걸 참을 수 없잖아요? 심지어 포장을 했을 때도 바삭함을 남기기 위해 박스를 한국식으로 바꿨어요. 현지에선 사방이 막힌 걸 썼다면, 꼬끼오는 구멍 뚫린 박스를 썼죠.

꼬끼오의 메뉴들. 치킨과 치킨 무, 김치, 김치 교자까지 한국의 맛을 정직하게 담았다. ⓒ꼬끼오
현지의 입맛 넘어, 식문화를 녹여야 선택받는다
핵심 메뉴의 맛은 한국식을 강조하되, 다른 메뉴와 공간에선 적극 현지화했습니다.
가령, 한국에선 옵션 같은 존재인 감자튀김을 기본 메뉴로 넣었어요. 마치 호프집의 뻥튀기처럼요. 독일인들 감자튀김이 주요 식사라는 점에서 착안한 아이디어였습니다. 또 채식하는 분들을 위해 두부튀김 같은 메뉴를 더했고요.
또 하나, 우리처럼 한 접시에서 나눠 먹는 게 생소한 이들을 위해 ‘판매 단위’를 바꿨어요. 반 마리, 한 마리가 아닌, ‘1인분 7조각’으로 양을 정했죠.
공간은 왁자지껄한 호프집이 아닌 ‘바’ 느낌을 주려고 했어요. 시간에 따라 조명과 음악을 달리했습니다. 오후 4시에는 식사 손님을 위해 조명 밝기를 높이고, 느긋한 비트의 음악을 틀었어요. 반면 해가 지는 오후 7시 이후부턴 술을 곁들이기 좋은 어두운 조명과 클럽 노래를 걸어뒀죠.
지금까지 이 세팅이 손님들의 선택을 받고 있습니다. 꼬끼오를 오픈한 첫날부터 만 7년 가깝도록 치킨 300인분을 거의 매일 팔았어요. 2025년 4월에는 기존의 30석 매장에서 80석 규모로 확장 이전까지 할 수 있었죠.

꼬끼오 매장 내부 전경. 첫 매장 오픈 당시부터 줄이 길게 섰고, 2025년 4월에는 기존 30석에서 80석 규모로 확장 이전했다. ⓒ안정아
Chapter 5.떼돈 버는 기쁨보다, 예술을 하는 마음으로
이제 8년 차가 된 꼬끼오. 동네에선 웨이팅 맛집으로 불립니다. 한여름 주말에는 평균 500~600명이 다녀가거든요.
사실 사람들이 많이 오는 것보다 재밌는 건, 손님들이 치킨을 먹는 모습을 보는 거예요. 이제 이곳은 한국 문화 홍보의 장이 되고 있습니다. 한국인과 함께 온 현지인들이 소맥을 만들어 마시고, 유쾌하게 술 게임을 즐기는 모습이 점점 보이거든요.
더 신기한 건 K-컬처에 빠져서 온 분도 늘고 있다는 겁니다. 한 현지인 단골은 불닭볶음면만큼 매운 스파이시 치킨을 시킨 뒤, 20도짜리 빨간 뚜껑 소주를 시키세요. 매운맛을 즐기며 ‘캬~’ 소리를 내곤 하죠. 「케이팝 데몬 헌터스」를 봤다며 부모님 손을 잡고 오는 아이들도 있고요.
손님들을 보며 느끼는 보람을 말하면, 질문을 받습니다. ‘돈도 많이 벌었겠다’고요. 솔직히 그렇지 않습니다. 나가는 비용이 크거든요. 매출의 30~35%가 세금이고, 직원 시급은 평균 2만5000원에 육박해요. 이것저것 빼고 남는 건 매출의 15% 정도. 딱 저희 부부가 먹고 살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이 도전을 한 걸 만족합니다. 후회하지 않는 걸 넘어 ‘정말’ 잘했다고 생각해요. 왜냐면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0부터 1을 일궈내는 데 성공했거든요. 50대에 들어섰지만 저는 ‘전 세계 어딜 가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저는 꼬끼오가 일종의 ‘종합 예술’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브랜드와 공간을 설계하는 건 물론, 회계와 인사, 요리와 마케팅, CS까지 도맡고 있으니까요. 전부 꼬끼오라는 작품을 위해서 하는 일이죠.
중요한 건, 제가 이 사실을 깨닫기까지 수없이 많은 여행을 거쳐왔다는 겁니다. 10년 전 지사장으로 경영을 배울 때만 해도 제가 이 일을 할 줄 몰랐어요. 그때는 새로운 곳에서 배운다는 열망만 가득했죠. 이 시간이 쌓였기 때문에, 저는 지금 제 일을 ‘작품’으로 여길 수 있게 됐습니다.
사실 제 경험담이 대단하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이야기를 나누는 건, 누군가에게 힌트가 되고 또 다른 도전의 계기가 될 거라 믿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습니다. 지금 제가 꼬끼오에서 ‘손님들과 호흡하며 예술을 한다’는 기쁨을 발견한 것처럼, 여러분도 자신의 영역에서 저보다 더 큰 기쁨을 발견하시길 바랍니다.

꼬끼오 매장 앞에 선 안 대표. 그는 “앞으로도 한국 홍보대사의 역할을 하겠다”며, 꼬끼오와 치맥 문화를 넓혀가고 싶다고 밝혔다. ⓒ안정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