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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지제빵소 : 찐빵에 팥 대신 피스타치오, 김씨네 가족의 쫀득한 기획력

한이룸

이커머스

2025. 4. 10.

부안 시장 10평 가게에서 시작한 찐빵집이, ‘디저트 격전지’라 불리는 서울 신세계 스위트파크에서 2024년 팝업 매출 2위를 기록했어요. 새벽 6시부터 줄을 세웠죠. 인기 덕에 2025년 3월 ‘앵콜 팝업’까지 했고요.

찐빵 맛이 얼마나 다르길래, 싶었어요. 찾아보니 속재료가 별나더라고요. 팥뿐 아니라 피스타치오 카스테라, 공주밤, 제주쑥떡, 우유크림 맛까지 있었죠. ‘요즘 찐빵’ 같달까요?

신기한 건, 사람들이 이 찐빵을 먹으러 전북 부안까지 ‘10시 오픈런’을 한다는 거예요. 서울에서 차로 3시간, 가까운 광주에서도 1시간은 족히 걸리는데 말이죠. 연 10만 명이 찾는대요.

이름은 슬지제빵소. 시작한 지도 벌써 25년이랍니다. 그간 가게를 이끈 세 사람을 한자리에서 만났어요. 창업주 김갑철 씨, 둘째 딸이자 2대 사장을 지냈던 김슬지, 얼마 전 3대 사장에 올라 제빵소를 이끄는 막내 아들 김종우 대표까지요.

슬지제빵소 김갑철・김슬지・김종우

가난을 면하려고 시작한 찐빵 가게에, 식구들은 응원보단 원망을 보냈다고 해요. 한 개에 250원인 찐빵에, 마진도 나오지 않는 톳부터 칡순까지 넣어다 쪘거든요.

“봉사가 아니라 장사를 해야 하지 않겠냐”는 원성에도, 창업자 김갑철 씨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고 합니다. “기왕 할 거면, 다르게 해봐야지.”

김 씨의 고집을 지켜준 건 다름 아닌 자식들이었어요. 가난을 피해 상경한 사남매 중 세 명이, 다시 부안에 내려와 사업을 키우기 시작했죠.

호호 불어 먹는 팥 찐빵 대신, 차게 식어도 쫄깃한 ‘크림 찐빵’을 제안하기까지. 고군분투 속에서 성장한 가족의 이야기를 각자의 목소리로 전해드릴게요.

Chapter 1.김갑철 : 손님은 웃고, 가족은 울었다

슬지제빵소의 전신인 ‘슬지네안흥찐빵’을 시작한 김갑철입니다. 이 일에 처음 발들인 건 1999년이에요. 부안 토박이인 제가 아내와 운영하던 양계장을 닫은 뒤였죠. 조류 인플루엔자가 불어닥쳐 수십만 마리를 묻어야 했거든요. 눈물만 흘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도 뭐든 해야 했습니다. 빚 8000만원을 갚으려면요. 우리 부부만 바라보는 4명의 아들, 딸이 있었거든요. 아이 엄마와 먹고 살 일을 찾아다니다, 잠시 들른 휴게소에서 찐빵이 눈에 들어왔어요.

사람들이 찐빵을 많이 사 먹더군요. 논밭이 많은 부안에선 새참 거리 정도였는데 말이에요. 전주 시내의 찐빵집에도 가보니 주민은 물론, 관광객까지 줄 서서 사더랍니다.

가게 주인에게 물었어요. “우리도 찐빵을 만들 수 있냐”고. 400만원만 내면 찐빵 공장에서 설비부터 재료, 레시피까지 전수해 준다고 했죠. 하지만 그땐 마이너스 인생이라 단돈 몇십만 원도 없었어요.

방법이 없으면, 찾아야죠. 가까운 전주부터 강원도 안흥까지, 저와 아내는 찐빵 만드는 법을 어깨너머로 배운 뒤 맹연습에 들어갔어요. 밀가루 열 포대를 다 썼을까, ‘장사해도 되겠다’는 확신이 섰죠.

부모님이 빌려준, 부안 시장의 10평이 안 되는 가게에 자리 잡았습니다. 손님을 받았습니다. 이름은 슬지네찐빵. 둘째 딸 슬지의 이름을 따왔어요. 딸 이름을 걸고 정직하게 음식을 만들어 역경을 이겨내겠단 다짐이었죠.

롱블랙과 인터뷰하는 김갑철 씨. 사업 실패 후, 1999년 부안 시장의 10평짜리 가게에 찐빵 가게를 열었다. 1000개를 팔아도 25만원의 매출이 떨어졌지만, 손님이 찾는단 것에 감사해하며 장사를 지속해나갔다. Ⓒ롱블랙

손님에게 보답하고 싶어서

2000년에 문 연 가게, 장사가 곧잘 됐어요. 하루도 빠짐없이 문전성시였죠. 매일 25kg짜리 밀가루 한 포대를 다 썼는데, 찐빵 1000개를 빚을 수 있는 양이었으니, 말 다했죠?

비결이라면 안흥식과 전라도식 찐빵 레시피를 합친 거예요. 빚는 족족 쪄서 부드럽고 폭신한 안흥식과, 하루 정도 발효한 반죽을 써서 쫄깃한 전라도식의 장점을 섞었죠.

다만 제대로 쉬질 못했습니다. 자정에서야 가게를 마감한 뒤, 새벽 2~3시에 일어나 밀가루를 반죽해야 했거든요. 반년쯤 지나자 “이렇게 하다간 죽겠다”는 탄식이 저절로 나왔죠.

쉬엄쉬엄할 법도 하지만, 더 열심히 일했어요. 빚에 허덕이던 우리 가족을 손님들이 겨우 살려줬잖아요. 이분들이 계속 찾아주신 덕에 자식들 대학도 보낼 수 있었죠.

할 수만 있다면 보답하고 싶었습니다. 그 방법으로 ‘우리 농산물을 써서 갚아야겠다’고 다짐했어요. 국산 밀과 팥, 부안에서 나는 흑미와 쑥, 칡순을 직접 캐와서요. 흑미를 넣은 검정 찐빵부터, 칡순을 넣은 찐빵까지 만들어 팔았죠.

이렇게 팔면 고생은 덤입니다. 우리 밀이라고 무조건 더 좋은 건 아니거든요. 수입산보다 글루텐 함량이 적어 반죽이 뚝뚝 끊기죠. 우리 밀로 바꾸니 한동안 손님 발길도 끊겼어요.

맛과 식감을 살려보겠다고, 변산 바다에서 캐온 톳을 넣어 쫄깃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노력을 손님들도 점점 알아주셨죠.

김갑철 씨는 새벽 2~3시에 일어나 밀가루를 반죽하고 찌는 과정을 매일 반복했다. 그사이 네 명의 자식들은 하나둘 서울로 떠났다. Ⓒ슬지제빵소

Chapter 2.김슬지 : 0.0001%의 가능성, 현실이 됐다

가게 간판에 걸린 제 이름이 부끄러웠던 중학생 딸, 슬지제빵소의 2대 사장 김슬지입니다.

열심히 일할수록 몸이 상하는 아버지. 전 그런 아버지가 답답했어요. 돈 되는 장사를 해서 가족 살림을 챙겨주지, 왜 250원짜리 찐빵에 과분한 재료를 넣어 마진을 안 남기냐고요.

2004년 스무 살이 되자마자 서울로 떠난 건, 이런 원망을 버리고 싶어서였어요. 일찍 돈 벌어 집에 보탬이 되려고요. 알바로 처음 번 돈은 65만원, 한 달에 이틀만 쉬며 일했죠. 그 돈으로 반은 저축, 반은 제 생활비와 언니, 동생들이 필요한 걸 사줬어요.

스물다섯엔 전문대에 들어가 시계 세공을 배웠죠. 어느 면접에 가도 늘 고졸이 발목을 잡았거든요. 어려운 형편에 지역 장학금을 받아 첫 등록금을 냈고, 모아둔 돈으로 작은 방을 하나 구했어요.

서울 생활에 적응해 가던 저를, 아버지가 찾았어요. “집에 돌아와 일을 도와달라”면서요. 어머니가 큰 수술을 두 번 치르느라, 아버지 홀로 장사를 도맡았거든요. 맏언니와 동생이 어려워하자, 마지막으로 제게 온 거였죠.

부안에 돌아간다는 생각, 0.0001%도 없었어요. 오죽하면 부모님의 반대에도 도망치듯 상경했을까요. 하지만 끝내 ‘상황이 괜찮아질 때까지만 도와주자’는 생각으로 잠시 부안에 내려왔습니다.

9년 만에 찾은 부안, 달라진 건 없었어요. 아버지는 여전히 고되게 일하시고, 집엔 내 몸 하나 누워 잘 자리조차 없었죠.

딱 하나 달라진 건 아버지의 꿈이었어요. 남들과 다른 찐빵을 실험하신 분이잖아요. 이젠 ‘찐빵 파는 카페’를 만들려 하더군요. 찐빵집을 키워 아예 ‘가업’으로 이어가고 싶다면서요. 사람들을 카페에 초대하고, SNS로도 소통하고, 온라인 몰로 찐빵을 팔아 매출을 키워보시겠단 거였죠.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너무 컸어요. 아버지가 만들고 싶은 카페는, 자판기 커피에 찐빵을 파는 정도였거든요. 보다 못한 제가 급히 가게 컨설팅을 신청했어요. 서울까지 가 교육을 받으며 아버지에게 매장을 바꿔보자고 했죠.

하지만 아버지와의 의견을 조율하는 게 어려웠어요. 매일 다퉜죠. 동시에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어요. 꿈은 커졌는데, 정작 택배 송장 하나 만드는 데 몇십 분씩 쓰던 아버지였으니까요. 이런 분을 두고 내가 무심하게 떠날 수 있을까, 생각했어요.

마음을 잡았습니다. 떠나지 못할 거라면, 아버지와 같이 일하되 내 역량도 같이 키워나가겠다. 그래서 제대로 된 찐빵집을 만들고 말겠다고.

롱블랙과 인터뷰하는 김슬지 의원. 2022년까지 슬지제빵소의 2대 사장으로 일했고, 지금은 전북 도의원을 지내고 있다. Ⓒ롱블랙

Chapter 3.김슬지 : 국내 최초 찐빵 베이커리를 만들자

두 팔 걷어붙이고 세운 목표는 하나였어요. 우리 찐빵 가게를 제대로 성공시키자.

제가 중요하게 생각한 건 3가지였어요.

첫째는 찐빵 생산의 반자동화. 손으로 반죽을 뜯어 빚는 건, 생산성도 떨어지고 매출에도 한계가 있었거든요.

두 번째가 중요해요. 찐빵이 ‘싸고 저렴한 간식’이라는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아버지가 아무리 더 좋고 건강한 재료를 써도, 제대로 된 가격을 못 받는 건 편견 때문이니까요. 이걸 해결해야 했죠.

셋째는 브랜딩이었어요. 아무리 잘 팔아도, 스토리텔링이 없으면 충성 고객이 생기지 않을 거라 봤어요. 슬지네는 어떤 곳인지, 왜 슬지네에서 찐빵을 사야 하는지 고객에게 전해야 했죠.

목표를 이루려면 혼자선 부족했어요. 동생들이 필요했죠. 셋째 동생에겐 SNS 마케팅을, 막내에겐 찐빵 생산을 부탁했어요. 아버지에겐 이렇게 장담했어요.

“우리 도전이 혹여나 실패해도, 이건 아빠의 실패가 아니라 우리의 실패야. 혹시 실패하더라도 우리가 갚아나갈 거야. 그런데, 실패하지 않을 자신도 있어.”

사업에 보탬이 된 건, 농업기술원 아이디어 콘테스트 상금이었어요. 1억원의 큰돈이었죠. 아버지가 특허받은 ‘발아 팥앙금’으로 세 번을 도전한 끝에 우승해서 얻은 거였어요. 이 돈을 전부 반자동 공장에 투자했습니다. 조상님 무덤부터 집문서까지 담보로 잡고, 친인척의 손까지 빌려 8억원의 대출금을 보탰죠.

다음은 ‘저렴하다’는 편견 없애기. 저는 식구들에게 제안했어요. “부안까지 찾아와서 먹고 싶은 찐빵을 만들자”고.

그러다 떠올린 게 찐빵의 베이커리화예요. 찐빵 속 재료부터 모양까지 다양하고 먹음직스럽게 만들어, 도시 외곽의 베이커리처럼 즐기게 하고 싶었거든요.

찐빵에 꼭 팥만 들어있을 필요가 있을까요. 요즘 사람들이 좋아하는 크림치즈나 커스터드 크림을 채우면? 평범한 빵보다 훨씬 경쟁력 있을 거라 생각했죠. 젊은 사람들은 신선해하고, 어르신들은 다른 빵보다 찐빵 피를 더 부드럽게 느낄 테니까요.

물론 계획이 순조롭진 않았어요. 자금이 부족해 아버지를 설득했지만, 회의적이셨거든요. 그래서 아버지를 차에 태우고 카페 투어를 돌았어요. 도시 외곽의 인기 베이커리 카페에 가, 두 눈으로 확인시켰죠. 부산의 산속에도, 대전의 외진 동네에도 맛있는 빵과 세련된 공간만 있으면 사람들이 찾는다는 걸요.

그렇게 돈을 끌어모아, 2017년 곰소 염전 앞에 2층짜리 베이커리 카페를 세웠어요. 하늘과 구름을 비추는 염전을, 외지인은 우유니 사막*처럼 매력적으로 느껴주시더라고요. 의도한 건 아니지만요.

  • 볼리비아에 위치한 세계 최대 소금 사막. 우기에 고인 빗물이 하늘을 투명하게 비춘 풍경으로 유명하다.

이름도 바꿨어요. 슬지네찐빵 대신 ‘슬지제빵소’로요. 찐빵에 갇히지 않고 다양한 시도를 해보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가 만든 오색 찐빵과, 저와 동생들이 제안한 생크림 찐빵을 팔기 시작했어요.

슬지제빵소를 시작할 당시의 전경. 1층에서 빵을 구매하고, 2층에 테라스를 둬 곰소 염전을 바라보도록 설계했다. 현재는 건물을 확장해 두 채의 건물을 운영 중이다. Ⓒ슬지제빵소

Chapter 4.김종우 : 팥 대신 크림치즈, 찐빵 실험을 시작하다

현재 슬지제빵소를 이끄는 3대 사장 김종우입니다. 전 슬지제빵소에 가장 늦게 합류했어요.

원래는 요리사가 되고 싶었어요. 어릴 땐 가업을 물려받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가업에 보탬이 될까 싶어, 서울의 전문대학에 들어가 프랜차이즈 경영도 배웠죠. 하지만 서울살이가 더 좋아졌습니다. 슬지 누나가 함께 일하자고 불러도 내려가지 않은 때도 있었죠.

스물둘, 한창 레스토랑에서 일하던 중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어요. 이젠 정말 제가 필요하다고요. 찐빵 베이커리를 열 테니, 고향에 내려와 찐빵 만드는 기술을 배우라고 했죠. 마지못해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버지 따라 찐빵을 빚다 보니, 보는 눈이 생겼어요. 빈틈을 보는 눈이요. 지금 찐빵도 맛있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할 순 없을지 고민했어요. 오디나 뽕잎을 넣으면 건강엔 좋아도 매력적이진 않으니까요.

누나들과 밤낮으로 이야기했어요. 왜 베이커리 빵은 한 개에 5000원이 넘어도 잘 팔리는데, 왜 우리 빵은 제값을 못 받을까. 차별점이 궁금해 누나들과 전국 백화점이나 유명 베이커리는 다 찾아갔죠.

그때 깨달았어요. 사람들이 줄 서서 먹는 베이커리는, 맛을 떠나 먹음직스러운 비주얼을 가졌다는걸요. 크림이 줄줄 흐르는 빵 단면을 찍어 SNS에 자랑하기도 하니까요.

그때부터 홀로 찐빵 연구에 들어갔습니다. 크림 주입 기계를 사 생크림 찐빵, 크림치즈 찐빵, 초코 찐빵 등을 개발해 나갔죠.

현재 슬지제빵소를 이끄는 김종우 대표. 그는 전국의 베이커리를 돌며, 더 많은 사람이 좋아할 만한 찐빵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롱블랙

빈틈을 찾아, 제빵소 앞에 줄을 세우기까지

슬지제빵소 오픈과 함께 3500원에 내놓은 생크림 찐빵, 동네의 반응은 냉정했고, 손님은 찾아오지 않았어요. 하루 서너 개만 팔렸죠.

문제는 찐빵 반죽이 얇아 쉽게 터졌다는 것. 또 식물성 대신 동물성 크림을 넣으니 조금만 놔둬도 녹아 뭉글뭉글해졌죠. 3개를 만들면 1개는 못 팔았어요.

누나들이 고민하는 사이, 전 공장에 침대를 깔았어요. 그곳에서 살다시피 머물며 단단하고 쫄깃한 반죽을 완성했죠. 누나들 모르게요. 혼자 해내고 싶었거든요.

반죽을 만든다고 다가 아니었어요. 다음은 식감 살리기. 부드러운 반죽에 부드러운 크림이 더해지면? 금방 물려버리죠.

어떻게 해야 씹는 즐거움을 줄까? 고민하다 떠올린 게 ‘아몬드 크런치’예요. 아몬드를 잘게 부숴 크림과 섞으면, 바삭한 식감을 살리면서 고소하기까지 하니까요.

덕분에 아몬드 크림치즈, 크랜베리 크림치즈 찐빵이 나왔어요. 가짓수가 늘자 사람들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죠. 그중에서도 저희 가족은 2018년 어린이날을 아직도 잊지 못해요. 슬지제빵소가 문 열고 처음으로 긴 줄이 늘어섰거든요. 매장 바깥까지요.

그때 비로소 ‘이 일을 계속 해도 되겠다’고 확신했어요. 찐빵으로 베이커리를 만든다는 건 최초라, 매일 막막한 기분만 들었거든요. 아무리 기발한 아이디어로 빵을 만들어도, 찐빵의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지 않을까 걱정했었죠.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 ‘상상하는 대신 실패하기’였어요. 만들고 버리길 수없이 반복하고, 너무 힘들어 눈물이 날 때도 있었지만요. 결국 실패한 경험 속에서 사람들이 먹고 싶어 할 빵이 나올 거라 확신했죠.

크림치즈에 아몬드와 크랜베리를 넣어 식감을 살린 찐빵. Ⓒ슬지제빵소

Chapter 5.김종우 : 쪽박 팝업을 새벽 6시 오픈런하게 만들다

여기서 머물렀다면, 슬지제빵소는 부안 갈 때 들리기 좋은 이색 빵집 정도로 끝났을 거예요.

슬지제빵소를 한 단계 성장시킨 건, 백화점 팝업의 처절한 실패였어요. 때는 2021년, 롯데백화점 동탄점 오픈에 맞춰 MD가 우리에게 팝업을 제안했죠. 제가 팝업 기획부터 운영을 모두 맡기로 했습니다.

부끄럽지만, 무조건 잘 될 줄 알았어요. 현실은 정반대였습니다. 옆자리 팝업 부스가 대기줄로 북적일 동안, 슬지제빵소는 지나가는 고객을 부르기 바빴거든요. 애써 잡아도 이렇게 말씀하셨죠.

“무슨 찐빵이 이렇게 비싸?”

나름 부안에선 줄 서는 빵집이지만, 바깥에선 여전히 ‘찐빵’이라는 점이 편견을 만든 거예요. “따뜻하지도 않은 걸 어떻게 먹냐”면서요.

서러운 마음을 가라앉히고, 원인을 냉정하게 짚었어요. 근본적인 물음을 던졌죠. ‘왜 우리 찐빵은 부안을 벗어나면 반응이 다를까?’ 당연한 결과였어요. 염전을 내려다보며 먹는 찐빵은 이색적인 이벤트겠지만, 백화점에선 오직 제품으로 승부해야 했으니까요.

그때 생각했어요. 제품이 매력적이지 않으면, 잠깐의 이슈로 끝나고 말 거라고. 계약된 팝업이 아직 두 건 더 있었으니, 전략을 바꿔보기로 했죠.

① 고객의 의심에 먼저 다가가기

찐빵에 의심의 시선이 많았다면, 다음 팝업에선 그 의심을 한 발 먼저 짚어주기로 했어요.

가령 손님에게 “찐빵이 따뜻하지도 않은데 어떻게 먹나 싶으시죠?”라고 말한 뒤, 생크림 찐빵 조각을 건넨 다음 “한 번 드셔보라”고 권한 거예요.

3000원이 넘는 가격표를 유심히 보는 손님에겐, “무슨 찐빵이 이리 비싼가 싶으시죠?”라며 분위기를 주도했어요. 그러곤 “건강하고 좋은 재료를 넣었다”고, “생크림을 넣은 새로운 방식의 찐빵”이라며 드셔보라고 했죠.

마음을 연 손님에겐, 슬지제빵소가 어떻게 시작했는지 사연을 줄줄이 읊어줬어요. 손님도 얼마 없으니 긴 이야기 나누기도 좋았죠. 한 분 한 분에게 우릴 100% 이해시키겠다는 마음으로 임했어요.

슬지제빵소 매장의 진열대. ‘ㅅㅈㄴ’라는 브랜드 로고를 디자인해 정체성을 강화했다. Ⓒ롱블랙

② 좌절할 시간에 한 번 더 실행하기

또 이전 팝업에서 선택지가 적었다는 배움을 안은 다음엔, 백화점 빵집에 버금가는 풀 베이커리full bakery를 꾸며보기로 했어요.

예전엔 1년 걸려 신상품 하나를 만들었다면, 이번엔 이틀 만에 5가지 맛의 찐빵을 만들어 팝업 현장에서 팔았어요. 카스테라 커스터드부터 인절미 크림, 탕종 찐 식빵과 흑밀 식빵, 초코 크림 찐빵까지요. 염전의 소금을 활용한 소금커피도 함께 팔았고요.

가짓수가 많으면, 더 이상 ‘특이한 찐빵 몇 개’가 아니게 됩니다. 찐빵과 커피를 함께 먹는 디저트 베이커리로 손님들이 인식하기 시작하셨어요. 특이하지만, 그리 낯설진 않은 거죠.

저희는 팝업 때마다 새로운 찐빵을 선보여 입소문을 퍼뜨리기도 했어요. 2024년 신세계 강남점에서 팝업을 열 땐 ‘소금 찐빵’을 공개했죠. 구운 사과를 갈아낸 뒤, 곰소 염전의 천일염과 섞어 숙성한 반죽을 썼어요. 짭짤한 맛과 달짝지근한 향이 배어있죠.

노력을 알아봐 준 덕일까요. 신세계에서의 팝업은 하루 800만원어치를 팔아치울 정도로 잘 됐어요. 소금 찐빵을 먹으러 “새벽 6시부터 기다렸다”는 후기도 보였습니다. 앵콜 팝업까지 할 정도였죠.

팝업에서의 경험이, 슬지제빵소를 비로소 브랜드로 만들어준 것 같아요. 이제 손님들은 이색적인 찐빵 가게를 넘어, ‘한국식 디저트 베이커리’로 여겨주시거든요. 이젠 연 10만 명이 저희를 찾아주시죠.

슬지제빵소는 팝업의 실패를 밑거름 삼아, 10가지가 넘는 맛을 개발하며 찐빵의 디저트 베이커리화에 도전했다. Ⓒ슬지제빵소

Chapter 6.김갑철 : ‘받은 만큼 돌려드리겠다’는 이유

다시 김갑철입니다. 자식들이 사업을 이끌어준 덕에, 저는 은퇴한 농부처럼 지내고 있어요. 아침 일찍 제빵소를 청소하는 게 저의 일과죠. 오전 10시면 전국에서 찾아오는 손님을 맞이하려고요.

간혹 넓어진 우리의 카페를 보고 오해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돈 많은 집안이냐, 금수저냐”면서요. 그럼 답해드리죠. 이 건물들, 25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은 부부와 자식의 노고로 만들었다고요. 그리고 그 배경에는 제일 힘들 때 우릴 찾아주신 지역 주민이 있다고 설명하죠.

저는 사업이 성장할수록, 내가 누구에게 도움받았는지를 생각하곤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잊었다면, 우린 1년도 버티지 못했을 거예요. 내가 받은 도움을 갚을 방법을 꾸준히 찾고, 이걸 해내기 위해 또 열심히 사는 거죠.

이런 마음을 제빵소에서 일하는 스무 명의 직원에게 가장 자주 전합니다. 슬지제빵소가 어떻게 지금까지 왔는지, 우리가 지금껏 받은 마음을 왜, 어떻게 베풀어야 하는지를요.

또 약소하지만 2003년부터 송산효도마을*에 저희 찐빵을 나누고 있습니다. 번 돈의 일부는 부안 근농장학재단에 매년 기부하죠. 아이들이 저희의 뜻을 이어받아 나눔을 베풀길 바라면서요.

  • 원불교 재단이 운영하는 전북 부안의 노인 요양 기관.

받은 만큼 돌려드리려는 마음. 어쩌면 우리 같은 로컬 브랜드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큰 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25년 전의 품은 그 마음을 저는 앞으로도 놓치지 않고 살고 싶습니다.

(왼쪽부터)김슬지 의원, 김갑철 씨, 김종우 슬지제빵소 대표. 가족들은 따로 또 같이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