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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카인드 : 전설의 입시학원 원장, 대기자 1200명 사과 브랜드 만든 이유

한이룸
이커머스
2025. 7. 6.
마트 사과보다 2배 비싼데, 정기 구독을 받으면 1분 만에 1300명이 대기하는 사과 브랜드가 있어요.
사과 한 알의 가격은 무려 5000원대. 심지어 블로그나 카페에선 ‘구독 실패 후기’를 볼 수도 있죠. 대체 무엇이 다른 걸까요?
주인공은 애플카인드AppleKind예요. 2016년부터 강원도 양구에서 1만5100그루의 사과나무를 기르는 곳이죠. 이곳의 오랜 구독자인 윤경혜 눈이부시게 대표가, 창업자와 이야길 해보자고 합니다.
윤경혜 눈이부시게 대표
애플카인드의 창업자 김철호 대표는, 전설의 입시학원이라 불리는 ‘글맥학원(현 G1230)’을 운영하던 사람입니다. 전성기엔 원생 1만2000명, 직원 700명을 둔 ‘특목고 합격자 최다 전국 배출 학원’으로 알려졌죠.
그런 그가 2016년, 연고도 없는 양구에서 애플카인드를 만들었습니다. 펀치볼* 6만 평 산자락에 사과밭을 심고, 브랜딩을 의뢰하기 위해 런던까지 날아갔다고 해요.
양구 해안면 해발 400m~500m 고지대에 발달한 분지. 주위가 마치 화채Punch 그릇Bowl 같아 펀치볼 마을이라 불린다.
수고스러운 과정이 담겨서일까요? 사과는 ‘달면 그만’이라는 제 편견을 깨게 합니다. 신맛이 강하고 아삭한 황금, 묵직한 단맛의 감홍, 새콤달콤한 부사까지. 이곳에서 키우는 사과의 맛과 향, 식감이 제각각이거든요.
학원부터 사과 농장까지, 그가 만든 남다른 사업의 철칙을 함께 들어보시죠.
Chapter 1.가마솥에 보리차 끓여주는 학원
“귀농한 지 10년이 넘었습니다.”
이 말과 함께 우리를 맞이한 김철호 대표. 그는 오랜 산자락 생활에 적응한 듯했어요. 새치가 섞여 은빛을 머금은 머리, 햇살에 그을린 구릿빛 피부까지.
걱정 한 점 없는듯 편안해 보이지만, 그의 과거는 녹록지 않았다고 합니다.
일타 강사가 채워주지 못하는 것
김 대표는 서울에서 나고 자랐지만, 서울의 혜택을 누릴 순 없었습니다. 넉넉하지 않은 집안 형편에,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돈을 벌어야 했거든요. 우유와 신문 배달까지 뛰었다고 합니다.
서른 살에 시작한 학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가정을 꾸리느라 쌓인 빚 2000만원을 갚아야 했어요. 마침 학원을 운영하던 친척을 드문드문 돕던 김 대표, 여기서 빈틈을 찾아냈어요.
“1990년대 초였어요. 서울 중심으로 학원이 빠르게 늘어나니까, 아이들이 하루 대부분을 학원에서 보내더라고요. 보육 기관이나 다름 없었죠. 그때 생각했어요. 제가 일타 강사는 못 되어도, 아이들이 공부하고 싶게 만드는 ‘편안한 학원’을 만들 수 있겠다고.”
있는 돈을 끌어모아 초등 속셈학원을 시작했습니다. 서울 이화여대 앞 13평 공간에 자리를 잡았어요. 교실 한 칸도 안 되는 곳에 강사를 데려와 낮엔 강의를, 저녁엔 김 대표가 학생과 학부모 상담을 했죠.
이런 학원이 무슨 경쟁력이 있었을까요. 겨우 임대료를 내는 데에만 급급했던 김 대표. ‘이대론 안 되겠다’고 각성한 계기가 있습니다.
“학원을 시작한 지 6개월쯤 됐을까요. 학원 창문을 선팅해 준 업자가, 저를 ‘사기꾼’이라 부르더군요. 작업비를 줄 돈이 부족해 ‘조금만’ 하고 미루다 보니 사달이 난 거였죠. 그때 깨달았어요. 내가 그럴 의도가 없었다 해도, 저 사람 입장에서 나는 사기꾼이겠구나. 돈 없는 게 죄가 될 수도 있겠구나.”
그때부터 김 대표는 ‘남들보다 더 나은, 돈 잘 버는 학원’ 만들기에 돌입합니다. 하지만 일타 강사를 데려올 수 없으니 다른 학원이 채우지 못하는, ‘돈 없어도 할 수 있는 일’부터 찾아 나섰어요.
특별한 게 아니었습니다. 한여름이면 새벽마다 가마솥에 보리차를 끓인 뒤, 얼음을 채운 물병에 담아 아이들에게 나눠줬죠.
“귀하게 키운 아이들을, 어떻게 하면 귀하게 대접할지를 생각했어요. 여름에 생수를 사주면 좋았을 텐데, 그럴 돈조차 없어 보리차를 끓인 거죠. 자칫 아이들이 수돗물을 먹고 배탈이 날까 봐서요.”
그의 진심은 학부모에게도 전해졌습니다. ‘아이들을 챙겨주는 학원’이라는 입소문이 퍼져, 원생이 100명까지 늘었죠. 얼마 뒤 연희동에 문을 연 외국어 학원에선 400명이 수업을 들었습니다.

인터뷰 중인 김철호 대표. 고등학교 졸업 후 곧장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일하던 그는, 서른 살 무렵 서울 이대앞의 13평 짜리 공간에서 속셈학원을 시작했다.
Chapter 2.삼성 자서전 10권을 읽으며, 학원을 바꾸다
학원으로 성장세를 키우던 김철호 대표. 기세를 몰아 ‘고등학교 입시’에 도전합니다. 1995년 경기도 일산에 입시 전문학원 ‘글맥학원’을 세웠죠. 당시 그가 가장 공들인 건, 바로 ‘리더십 키우기’였어요.
“처음엔 애를 먹었어요. 400명 규모의 학원을 하다가, 1000명이 넘는 곳을 해보려니 쉽지 않은 거예요. 그때 깨달았죠. 강사가 잘 가르치는 학원은 한계가 있다. 중요한 건 원장이 재능과 열정 있는 선생님과 원생을 키울 ‘리더십’이 필요하다.”
그는 리더십을 배우겠다며, 무작정 광화문 교보문고를 찾았습니다. 삼성그룹의 역사서와 이병철, 이건희 자서전 열 권을 사 왔죠. 매일 새벽부터 원장실에 앉아 한 권도 빠짐없이 독파했고요.
반복해서 읽다 보니, 결국 남은 건 한 줄이었습니다. 인재 양성.
“당시 삼성은 리더 몇 명이 성공시킨 게 아니었어요. 한국에서 제일 우수한 학생들을 데려와, 그들을 인재로 키워낸 게 핵심 요인이었죠.

글맥학원(현 G1230)이 처음 시작한 일산 후곡점. 김철호 대표는 서울 타워팰리스, 조선호텔 등을 설계한 최시영 건축가에게 모든 글맥학원 캠퍼스의 설계를 의뢰했다.
공부 안 시키는 학원, 전국 1등이 되다
‘인재가 먼저 찾는 학원’을 만들겠다 다짐한 김 대표. 그는 공부만 시키는 곳이 아니라, 원생이 머무는 동안 ‘알아서 성장하는 환경’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차별화된 콘텐츠로요.
가장 먼저 손댄 건 수업 구조였습니다. 글맥학원을 강의보다 ‘자습’이 더 많은 곳으로 바꿨죠. 시간표의 절반 이상이 자습으로 채워졌고, 매 교시마다 담임이 아이들의 학습 상황을 돌봤어요.
“성적이 높은 극소수의 아이들은, ‘스스로 해결하는 능력’을 가졌어요. 배운 걸 철저히 내 것으로 만들죠. 수업보단 자습이 공부의 본질인 셈이에요. 그래서 90분짜리 수업을 45분으로 줄였죠. 선생님들 반발이 무척 심했지만요.”
원생들의 환기를 돕기도 했습니다. 2007년에는 1억원을 들여, 중3 학생 모두를 이끌고 예술의전당 ‘투란도트’ 공연을 관람했죠. 통학 셔틀버스에 ‘키스 해링Keith Haring의 그래피티’를 입히기도 했어요. 매일 타는 버스에서 예술을 마주한다면, 하루가 조금은 다를 거라 생각해서요.
성적이 아닌 사람에 대한 투자는, 자연스레 성과로 이어졌습니다. ‘학원계의 삼성’이라는 별명이 붙으며 내로라하는 강사가 찾았고, 성적 높은 학생들이 뒤따라왔죠. 2000년대 중반 무렵, 매해 700명을 특목고에 진학시키기도 했습니다.
글맥학원(현 G1230)의 옛 셔틀버스. 원생이 일상에서 쉽게 예술을 접하도록, 키스 해링의 작품 라이선스를 따와 그래피티를 외관에 입혔다.
Chapter 3.벼랑 끝에서 사과나무를 심다
남부러울 것 없던 김철호 대표, 2011년 돌연 원장직을 내려놓습니다. 서울 생활을 접고, 가족과 함께 강원도 인제로 내려가 버렸죠.
“서울로 돌아가 돈을 번들 내게 무슨 의미를, 행복감을 줄까? 생각이 들었어요. 하는 일이 사교육이니, 주변에서 칭찬 한마디 듣지 못했고요. 의미를 못 찾으니 몸도 마음도 많이 황폐해져 있었던 거예요.”
처음엔 ‘좀 쉬다 오자’는 생각이었대요. 그게 한 달에서 일 년으로 늘고, 또 삼 년이 됐습니다. 눈 떠지면 일어나고, 집 앞 텃밭에 난 상추를 따 먹는 생활. 이게 루틴이 되자 김 대표의 건강도 자연스레 회복됐죠. 그러자 보이지 않던 것들이 김 대표 눈에 들어옵니다.
“시골에 젊은 사람이 없었어요. 마지막 초등학교마저 문을 닫았고요. 왜 그런가 고민하다 ‘농업’에 주목했어요. 생각보다 건강한 먹거리가 부족하더군요. 농가마다 농약이나 화학비료를 많이 쓰는게 관행이거든요. 도시인보다도 나쁜 물질에 취약한 셈이죠. 이런 곳에 젊은 사람이 살고 싶어 할까요?”
김 대표는 결심합니다. 농업 전부를 바꾸진 못해도, 안심하고 먹는 농작물을 하나쯤은 기르겠다고. 그때 눈에 들어온 게 사과였어요. 근처 양구 해안면 일대에서 작게 사과를 키우던 농민들을 알게 됐거든요.
동시에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합니다. 남쪽에서 하던 사과 농사가 조금씩 북쪽으로 올라오고 있다는걸요. 21세기 말엔 강원도 일부 지역에서만 사과 재배가 가능할 것이란 전망*까지 나왔죠.
2018년 통계청 조사. 강원 산간을 제외한 남한 대부분이 21세기 후반에 아열대 기후로 변한다는 내용.
“사과는 한국에서 소비량이 가장 많은 과일이에요. 사람들이 먹을 ‘정말 깨끗한 사과’를 만들어보자. 그게 지금의 애플카인드를 시작한 이유예요.
2016년 3월, 김 대표는 가진 돈을 모두 쏟아 농업회사를 시작합니다. 일교차가 큰 양구 펀치볼 해발 500미터 땅에, 축구장 25개 규모의 사과밭을 일구기 시작했죠.

윤경혜 대표(왼쪽)와 김철호 대표(오른쪽)가 과수원에서 이야기 나누고 있다. 과수원이 위치한 양구 펀치볼은, 일교차가 커 사과를 키우기 좋은 곳으로 꼽힌다.
기본을 다지는 일이 가장 어렵다
사과 농사엔 적잖은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사과나무 한 그루가 성목*이 되려면 적어도 7년이 걸리거든요. 달리 말하면, 김철호 대표는 농약과 화학비료 없이 사과를 7년간 키워야 했단 뜻입니다.
어린 나무가 완전히 성장해, 본격적으로 결실을 보기 시작한 상태. 한 그루당 최대 300~500알을 수확할 수 있다.
“원래 기본을 다지는 일이 가장 오래 걸린다잖아요. 농사도 마찬가지였어요. 성장호르몬제나 착색제를 쓸 수 없으니, 퇴비도 자연 원료로만 만들어야 했죠.”
그는 자연 퇴비를 만들 기반부터 다집니다. 과수원 한켠에 1200평 넓이의 퇴비장을 만들었어요. 여기에 톱밥부터 쌀겨, 콩깻묵, 게 껍데기와 미생물을 섞었죠. 이걸 넉 달 동안 발효하고 여섯 달을 후숙하면, 땅과 사과나무가 건강하게 자랄 퇴비가 완성됩니다.
이게 다가 아닙니다. 시행착오를 견디는 것도 중요했죠. 김 대표는 대구의 사과 장인에게 컨설팅을 받을 만큼 노력했지만, 조금만 방심하면 사고가 났다고 해요.
“처음 2~3년은 사과나무를 죽이는 게 일상이었어요. 농사 초보였으니까요. 가령 초겨울엔 땅에 물을 축축히 줘야 ‘겨울 가뭄*’을 타지 않는데, 이것도 모르니 3000그루가 말라 죽기도 했죠.”*겨울철 강수량이 비교적 적어, 토양에 저장된 수분이 줄어드는 현상. 이를 막기 위해 본격 겨울이 오기 전 물을 뿌려두곤 한다.
실패를 경험 삼은 덕에, 2020년 첫 수확*을 해냅니다. 빛깔이 고운 홍로 사과가 가지에 주렁주렁 열렸어요. 김 대표는 그해 처음으로 사과를 주변 사람들에게 보냈습니다. 껍질부터 달콤한 향이 새어 나오고, 식감도 아삭하다는 반응이 하나둘 들려왔죠.
사과나무 묘목은 심은 지 약 3년 뒤부터 열매가 열리기 시작한다.
과수원 옆엔 1200평 넓이의 퇴비 발효시설이 있다. 다양한 재료와 미생물을 섞고 발효, 후숙해 퇴비를 완성한다. Ⓒ롱블랙
Chapter 4.로컬 브랜드 만들러 런던까지 날아간 이유
문경 사과, 충주 사과. ‘사과 브랜드’를 떠올릴 땐 지역 이름이 붙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애플카인드는 공식을 벗어나 ‘자체 브랜드’를 만들었어요. 영어로 ‘인류’를 뜻하는 humankind에 apple을 더해, ‘사과에 혼을 바친 인간들’이라는 뜻으로 지었죠.
이유가 있어요. 품질 좋은 사과를 키우고 있으니, 이 사과에 어울릴 ‘제값’을 찾아줘야 한다는 것. 김 대표는 이때 브랜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노력을 제대로 보상받을 방법으로요.
“저는 브랜드 파워라는 게, 소비자가 이름을 들었을 때 믿을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동시에 가격이 조금 비싸도 ‘난 이걸 사겠다’고 판단하게 하는 근거라고 봤죠.
브랜드를 키우기 위해, 김 대표는 전문가의 손을 빌리기로 합니다. 영국 런던의 브랜딩 에이전시, 빅피시Big Fish를 직접 찾아갔어요. 영국의 150년 소금 브랜드 말돈Maldon, 건강 시리얼 브랜드 도셋Dorset 등 40여 개의 유기농 브랜드와 협업한 곳이었죠.
숱한 거절을 거쳐야 했습니다. “애플카인드를 고급 사과 브랜드로 만들고 싶다”는 말에, 빅피시의 컨설턴트는 고개를 저었거든요. 사업 규모도 작고, 방향이 명확하지 않다면서요.
“그들(빅피시)은 제게 삼성과 애플의 차이를 이야기해 줬어요. 애플은 처음부터 ‘아름답고 실용적인 제품으로 인류에 공헌하겠다’는 이유로 아이폰을 만들었다. 반면 삼성은 ‘아이폰에 뒤지지 않을 스마트폰이 필요하다’는 데서 갤럭시를 시작했다는 거예요.”
즉, 오래 가는 브랜드를 만들려면 ‘이 일을 왜 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들려달라는 거였습니다.
“한 달 내내 제게 ‘왜why’만 물었어요. 왜 하필 사과를 키우는지, 왜 농업이 필요한지를요. 질문에 답하다 보니 생각이 선명해졌어요. 우리 아이들의 먹거리를 책임지고, 끝내 농업을 바꾸겠다고 했습니다.”
그 끝에 나온 브랜드가 애플카인드입니다. ‘50개의 평범한 사과보다, 하나의 놀라운 사과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정했어요.
여기에 파스텔 톤의 벌과 나비, 잎사귀가 붉은 사과를 둘러싼 로고를 완성했죠. 사과 위엔 작은 소녀가 앉아 있어요. 사람이 자연 속에서 느낄 ‘행복한 기분’을 전하고 싶어서요.
애플카인드의 사과 박스 패키지 디자인. 빅피시가 디자인한 BI(브랜드 아이덴티티)를 활용했다. Ⓒ애플카인드
Chapter 5.제품에 자신 있으면, 제값을 받아야만 한다
애플카인드는 시장이나 마트에 사과를 납품하지 않습니다. 품질을 책임지는 만큼, 판매도 농부가 직접 정하겠다는 거예요.
자신감의 정점은 2020년 시작한 정기 구독 서비스 ‘사과사색’에서 잘 드러납니다. 이름 그대로 네 가지 품종의 사과를 제철에 맞춰 보내주는 서비스예요. 9월엔 새콤한 홍로, 10월엔 향이 깊은 감홍, 11월엔 단단한 후지, 12월엔 노란빛의 황금이 도착하죠.
가격은 정과* 12kg 기준 19만9000원. 시중 사과 가격보다 4~5배 높은 편이지만,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사과도 공들여 키운다면, 그에 맞는 보상을 받는단 걸 농부들에게 보여주겠단 거죠.
사과 선별 과정에서 가장 높은 등급을 받은 사과.
“농업인들이 가장 힘든 게 ‘가격 결정권’이 없다는 거예요. 품질이 좋으면 그에 맞는 가격을 받아야 하는데, 보통은 도매시장에서 결정해 주는 가격에 맞춰 팔 수밖에 없죠. 누가 사 갈지 알 수도 없고요.”
그래서 애플카인드는 유통을 거치지 않고, 직접 소비자를 만나는 방식을 택했어요. 정기 구독은 그중에서도 가장 확실한 방법이죠. 덕분에 사과의 품질과 가격, 사과가 소비되는 ‘방식’까지 농부가 주도할 수 있으니까요.
고객을 직접 상대하니. 생각하지 못한 아이디어를 얻기도 합니다. 사과 건조 칩과 사과 탄산주스가 나온 것도 이 덕분이에요. 사과를 키우는 여름에도, 다른 방식으로 사과를 즐기고 싶다는 피드백을 받은 게 계기였죠.
“수확한 사과의 25~30%는 팔지 못하는 것들이에요. 맛은 좋지만 흠집이 났다는 이유로요. 이런 아이들을 모아 다양한 상품으로 만들고 있어요. 사과를 받아보지 못하는 동안, 애플카인드를 계속해서 기억하실 수 있도록요.”
직거래와 구독으로만 받을 수 있는 콧대 높은 사과, 어느새 ‘소중한 사람에게 선물하는 답례품’으로 입소문을 탔어요. 정기 구독을 받는 날엔 대기자만 1200~1300명이 몰린 적도 있죠. 지금은 직판과 구독이 거의 반반 비율로 나뉜다고 합니다.
정기 구독 서비스 ‘사과사색’에 담긴 네 종의 사과. 홍로부터 부사, 황금, 감홍까지. 구독자에게 9월에서 12월 동안 매달 제철 사과를 보내준다. Ⓒ애플카인드
Chapter 6.비전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모인다
애플카인드엔 김철호 대표와 함께 일하는 ‘젊은 동료’들이 꽤 있습니다.
먼저 김 대표의 세 아들이 그와 함께합니다. 김 대표의 첫째 아들과 셋째는 긴 캐나다 유학 생활을, 둘째는 은행원 합격을 뒤로하고 과수원에 합류했어요.
마케팅 팀장으로 일하는 박진영 씨는 북경대에서 영화 연출을 배운 인물이에요. 둘째의 친구였던 그는 “사과 브랜드 만드는 일이 재밌는 도전 같다”며 합류했죠.
나름의 꿈을 좇던 이들이, 왜 양구에 모인 걸까요. 특히 아들들은 가족의 사업에 선뜻 응하기 어려웠을 텐데요.
김 대표는 그 답이 비전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일찍이 자녀들에게 자신의 비전을 소개했다고 했어요.
“처음 애플카인드를 만들 때부터, 아들들에게 제 꿈을 틈틈이 보여줬어요. 빅피시를 만날 땐 런던에 함께 데려가기도 했고요. 양구에서는 끝이 보이지 않는 사과밭을 보여주며, 이 일은 단순한 농사가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일’이라 자주 이야기했습니다.”
그는 덧붙입니다. 도시에서 일한다고 행복한 것도, 농촌에서 일한다고 힘든 것도 아니라고. 중요한 건 리더가 선명한 미래를 제안할 때, 사람은 기꺼이 일할 수 있단 거예요.
“우리가 언제 좌절하나요. 돈이 없을 때가 아니라, 미래가 보이지 않을 때 힘이 빠지죠. 지금의 젊은 세대가 막막해하는 건, 어쩌면 어른들이 충분한 비전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비전이 있는 곳엔 사람이 모인다. 글맥학원과 애플카인드를 일군 김 대표가 품고 있는 ‘가장 큰 믿음’이었습니다. 양구의 사과밭을 뒤로 4시간 동안 대화한 제게 남은 한 문장이기도 했어요.
애플카인드에서 일하는 사람들. 김철호 대표는 10년의 양구 생활 끝에, “이제야 목표한 꿈의 1단계를 지나간다”고 말한다. 은퇴를 앞둔 그를 대신해, 젊은 사람이 더 많이 찾아와 애플카인드와 농업, 로컬 생활을 알리길 바란다는 것. Ⓒ애플카인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