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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경희 : 마흔 살 아이스크림 가게 사장님은 20년 뒤 어떻게 순대 장인이 됐나

한이룸
이커머스
2025. 9. 18.
육경희 대표는 사업가지만 ‘기획자’라는 이름이 더 어울립니다. 음식을 파고들어 메뉴부터, 공간과 마케팅까지 이야기로 풀어내는 인물이거든요. F&B 씬의 젊은 기획자들도 그를 롤모델로 삼습니다.
그의 기획력은 모든 일을 ‘빨리, 또 깊게’ 하는 데서 옵니다. 이를 토대로 그는 순대실록을 성공한 브랜드이자 순대 기록관으로 키웠어요. 여기에는 ‘오늘 결정한 일은 오늘 실행한다’는 원칙이 있었죠.
그렇다고 사업이 늘 승승장구한 건 아니었어요. 그는 2011년 순대실록을 열기까지, 8년간 두 번의 폐업을 겪었어요. 화재로 가게가 잿더미가 되기도 하고, 장사가 잘돼도 적자를 견딜 수 없는 순간도 경험했죠. 그 상황들을 육 대표는 어떻게 견뎌냈을까요. 그의 옛 경험들부터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Chapter 1.‘열 보’ 앞선 사업은 해선 안 된다
풍족한 음식과 함께 자란 전북 전주의 종갓집 막내. 육경희 대표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이에요. 1963년생인 그는 늘 사람과 음식에 둘러싸여 있었어요. 명절이나 제사 때면 30명 가까운 친척이 모였다고 합니다.
“저희 집 대문은 항상 열려 있었어요. 넉넉한 집안이라 소와 돼지를 잡아 나누는 일도 많았죠. 그 덕에 음식은 제게 ‘재밌는 존재’였어요.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도 많았습니다. 좀 더 커서는 식당에서 이것저것 맛보겠다고 메뉴를 여러 개 시켜서 주인 분에게 혼난 적도 있었어요.”
하지만 식당 주인이 될 생각은 없었어요. 학창 시절 육 대표의 관심은 ‘문학과 글쓰기’에 있었어요. 대학 때는 신문방송학을 전공했고, 졸업 후에도 잡지사에서 일했습니다. 26세가 된 1987년에는 청담동에서 글쓰기 학원도 운영했어요. 당시 박사 과정을 밟던 남편 대신 돈을 벌기 위해서였죠.
1997년부터는 전업 주부로 삶을 바꿨어요. 박사학위를 딴 남편은 대학교수가 됐고, 그사이 두 명의 아이들이 태어나 육아에 집중하기로 했거든요.
육 대표의 인생이 바뀐 건, 2003년부터예요. 그가 마흔이 됐을 때였죠. 오래 알고 지낸 지인이 대뜸 이런 제안을 해오더래요.
“오가닉organic 아이스크림 사업 해보지 않을래?”
당시 제안 받은 건 아이스크림 브랜드 ‘맥키스Mackie's’의 프랜차이즈. 스코틀랜드에 있는 가족 농장의 신선한 우유를 쓴다는 브랜드였죠. 그는 뭔가에 홀린 듯 제안을 덜컥 받았어요.
“남편과 함께 여행 다닌 유럽에서 유기농이 열풍이었던 것만 생각했어요. 조만간 우리나라에서도 뜰 줄 알았죠. 돌이켜 보면 세상 물정 모르는 행동이었어요. 그 시절에 관리비 포함해서 월세만 3000만원인 대학로 대로변 1층 매장에 ‘열겠다’고 했으니까요.”
2003년 5월, 육 대표는 모은 돈을 털어 보증금 5억원, 월세 3000만원에 120평 매장 ‘맥키스’를 열었어요. 새하얗게 칠한 내부에 영어로 쓰인 간판, 컵당 4000원인 아이스크림. 잠깐 눈길은 끌었지만, 당시 소비자들에겐 ‘너무 먼 음식’이었죠.
“가게를 오픈할 즈음, 제가 잘못했다는 걸 깨달았어요. 신문에서 ‘대한민국 최대 아이스크림 매장’이라고 소개했지만, 처음부터 하루 매출은 30만원을 못 넘겼어요. 2000년대 초반의 한국은 유기농을 받아들이기에 너무 일렀어요. 반보만 앞서야 되는데, 열 보를 앞섰던 거예요.”
설상가상으로 육 대표는 최악의 사고까지 겪습니다. 맥키스를 오픈한 그해 12월 3일 새벽, 가게에 불이 난 거예요. 냉동고 뒤에 쌓인 먼지가 일으킨 스파크 때문이었죠. 당시 그는 경기도 성남시에서 살고 있었어요. 전화를 받자마자 달려간 대학로 매장은, 이미 잿더미가 돼 있었습니다.
육 대표의 첫 외식업 도전은 그렇게 막을 내렸어요. 그의 손에는 은행 빚과 10년짜리 가게 임대 계약서만 들려 있었죠.

육경희 대표. 그의 첫 F&B 사업이었던 오가닉 아이스크림 가게는 오픈 1년도 채 되지 않아 문을 닫고 말았다고 한다.
Chapter 2.반강제로 시작한 남도 식당이 가르쳐 준 것
육경희 대표는 2004년 5월, 첫 사업 실패 5개월 만에 새로운 식당을 열었어요. ‘남도이야기’라는 이름의 전라도식 한정식 전문점이었죠. 불타버린 아이스크림 가게를 보수해 연 곳이었습니다.
사실 육 대표는 “다시는 먹는 사업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대요. 그런데 왜 한정식집을 연 걸까요?
건물주와의 관계 때문이었어요. 당시 건물주가 ‘불 난 건물에 빈 가게가 있으면 가치가 떨어진다’며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았거든요. 대신 “자신이 투자금을 더할 테니 남도 식당을 하라”고 했어요. 건물주는 전남 나주 출신이었거든요.
하지만 더 큰 문제가 있었어요. 당시 육 대표는 요리를 배워본 적이 없는 사장이었다는 것. 뭘 해야 할지 몰라 맥락 없는 요리를 냈다고 합니다. 한 번은 대게를 냈다가 “이게 남도 음식이냐”고 항의를 듣기도 했죠.
오픈 두 달 만에 육 대표는 결심합니다. 전라남도로 내려가기로. 재료와 음식을 직접 배우기 위해서였죠.
“살고 싶어서 갔어요. 신문과 잡지에 나온 식당을 다 찾아가 밥을 먹고, 무슨 재료를 쓰는지 사정해 알아내곤 했죠. 그렇게 목포 장인에게서 홍어를, 벌교에서 꼬막을 구해왔습니다. 그걸로도 부족해 홍어 동호회에도 가입해 어떻게 숙성해야 홍어가 가장 맛있는지도 배웠죠.”
3개월의 배낭여행을 마친 2004년 10월, 그는 다시 서울로 돌아왔어요. 과거 글쓰기 학원을 운영했던 경험을 살려, 음식들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어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육 대표는 쌀을 전라도에서 시험 재배하는 히토메보레ひとめぼれ*를 썼고, 김치는 광주광역시의 명인이 만든 김치를 수급해 왔어요. 서빙할 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드실 김치는 대통령상을 받은 김치예요. 밥은 전라도에서만 나는 히토메보레라는 쌀로 지었습니다.”
일본 미야기현에서 개발된 쌀 품종으로, 윤기가 많고 찰기가 좋아 밥맛이 달고 부드러우며, 식은 뒤에도 맛과 탄력이 잘 유지되는 것이 특징.
“어떤 콘텐츠를 기획하면서 멘트를 만든 건 아니에요. ‘나는 잘 모르니 재료를 하나하나 알아야겠다. 좋은 것만 받아서 밥상에 옮겨야겠다’는 생각뿐이었죠. 제가 현지에 가서 직접 보고 먹어본 재료다 보니, 이야기가 절로 붙었어요. 돌이켜 보니 그게 일종의 기획이 됐죠.”

남도이야기 시절의 육경희 대표(뒷 줄 왼쪽에서 두 번째)와 직원들. 육 대표는 직원들에게 개량 한복을 입히고, 각 재료에 얽힌 이야기를 꼭 손님에게 설명하도록 했다.
다시 문을 연 식당은 어떻게 됐을까요. 맛있다는 평을 넘어 ‘남도 한정식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라는 말을 들었어요. 그해 12월에는 식당을 시작한 뒤 처음으로 흑자를 냈어요. 2005년 가을부터는 식당의 하루 매출액이 300만원을 훌쩍 넘길 정도였어요.
하지만 남도이야기만으로는 사업을 건강하게 이어가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높은 임대료도 문제였지만, 메뉴가 다양해 재료비도 적잖게 들었거든요. 그는 수익을 만들기 위해 대학로에서 다른 프랜차이즈 매장을 열었습니다. 2007년에는 고깃집을 열었고, 이어 중국집과 국수집도 오픈했죠.
그래도 적자를 견디지 못한 육 대표, 2008년 남도이야기의 문을 닫기로 해요. 건물주와의 빚만 해결한 정도였죠.
두 번째 폐업을 하는 육 대표의 생각은 어땠을까요. 오히려 더 결연했다고 합니다. 당시 그는 ‘100년 갈 내 브랜드’를 꿈꾸기 시작했죠.
“남도이야기를 할 때는 계절마다 코스를 바꿨어요. 요리에 대한 배움을 많이 쌓았죠. 하지만 재료가 한 1000가지가 되는데, 이걸 다 공부할 시간에 한 가지만 파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럼 대한민국이 아니라 세계 1등도 될 수 있을 것 같았죠.”

맥키스 아이스크림 가게 자리에 다시 문을 열었던 남도이야기. 방송 출연 요청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장사가 잘 되었지만, 높은 원가와 임대료로 결국 5년 만에 문을 닫아야만 했다. ⓒ육경희
Chapter 3.순대실록 : 연구자도 미식의 감각을 얻을 수 있다
2011년 6월 15일. 육경희 대표가 순대실록을 오픈한 날이에요. 원래는 고깃집을 차리려 했대요. 식당을 하며 고기는 늘 먹힌단 걸 깨달았거든요. 마침 딱 어울리는 150평짜리 가게를 눈여겨 보고 있었습니다. 대학로 동숭길에 있는 테라스가 있는 순댓국집이었죠.
하지만 세상일은 맘대로 안 되죠. 프랜차이즈 매장을 운영하며 돈을 모으던 2011년, 순댓국집*이 갑자기 매물로 나왔어요. “일단 내가 가져온다”는 마음으로 가게를 인수합니다. 문제는 그러고 나니, 인테리어할 돈도 안 남았단 거였죠.
인수 당시에는 ‘신의주 손 찹쌀 순대’였다. 육 대표는 2013년 ‘순대실록’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비싼 임대료 내면서 문을 닫고 놀릴 순 없잖아요? 하루 꼬박 가게를 청소하고, 꽃을 사다가 테라스를 꽃길로 만들고 다음 날 문을 열었어요. 그것만으로도 30만원이던 일 매출이 100만원으로 늘었죠.”

육 대표가 2011년 인수한 신의주 손 찹쌀순대. 테라스에 반해 인수했으나, 고깃집으로 바꿀 여력이 없어 계속 순대를 팔게 됐다. 이때부터 순대와 육 대표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육경희
당장 고객의 눈길은 끌었지만, 본질적인 문제가 있었어요. 바로 ‘순대의 맛’. 특유의 냄새로 인해 대학생 손님들은 순댓국집을 찾지 않았습니다. 이들에게 순대는 ‘길거리 음식’일 뿐이었죠.
순대의 맛과 이미지를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육 대표는 또 연구를 시작합니다. 이번엔 더 깊이 파고들었어요. 전국 순댓집 300개에 방문하는 건 물론, 순대를 다룬 책을 찾아 도서관을 뒤졌어요.
그러다 『시의전서』라는 고서를 발견해요. 1877년 조선 후기에 쓰인 음식 조리법 책이죠. 그는 여기서 ‘슌대’를 발견합니다. 과거에 순대를 부르는 말이었죠. 돼지 창자 속에 피·숙주·미나리·두부·배추김치·무를 넣어 삶는 요리였어요.
“책을 읽는데 기가 막혔어요. 어렸을 때 집에서 만들어 먹던 순대와 거의 비슷했거든요. 『시의전서』의 조리법은 지금도 따라 할 수 있는 방법이었어요. 이때 결심했습니다. 이걸 붙잡고 ‘과거·현재·미래의 순대를 내가 만들겠다’고. 이게 내 브랜드가 될 거라는 확신이었죠.”
이때부터 육 대표는 레시피를 연구했어요. 전통 순대의 조리법을 재현하면서, 자신이 그간 쌓은 노하우를 녹여내기 시작했죠. 예를 들면, 양배추와 당근을 넣어 씹는 식감을 살리되, 사람들이 좋아하는 돼지고기를 넣는 식이었어요.
그는 감각에 과학적 근거를 더해 순대를 발전시켰어요. 한 논문을 보다가 ‘순대의 속을 잘 뭉치게 하고, 건강에도 도움을 주는 선지의 비율은 11%’라는 것까지 알아냈죠. 그 정보를 토대로 육 대표는 선지의 비율을 맞춰 순대 한 줄기에 17가지 재료를 넣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니까 더 파고들 수 있었어요. 번역본도 그냥 받아들이지 않고, 할 수 있다면 중국 원문과 대조하며 확인했습니다. ‘그랬구나’가 아니라 끝까지 봐야만 마음이 편안해졌죠.”

전국 300여 곳의 순댓집을 돌아다니며 순대를 연구한 육경희 대표. 그는 유명한 맛집부터 시장 순대까지 가리지 않고, 재료와 만드는 방법, 맛을 탐구했다. ⓒ육경희
육 대표는 자신이 공부한 내용을 그대로 식당에 담아냈어요. 순대의 비릿한 향을 잡은 건 물론, 손님들에게는 지금 대접하는 순대가 어떤 고민에서 나왔는지 알렸죠. 간판에서부터 ‘그냥 순대가 아닙니다, 전통 순대를 만듭니다’라고 썼고, 메뉴판에는 『시의전서』이야기를 담았어요.
“당시 순대 시장은 당면순대가 90%, 지역 순대가 10%로 구성돼 있었어요. 저는 그 틈에 ‘전통 순대’를 만들어 넣은 거예요. 길을 낸 김에, 우리의 순대를 끝까지 가져가겠다고 결심했어요. 기록하고 알리고 개선하는 것도 제 일이라 생각했죠. 그래서 이름도 ‘순대실록’으로 새로 지었어요.”

2025년 9월 리뉴얼 오픈한 대학로 순대실록 본점. 순대를 기록하고 잇겠다는 뜻을 담아 입구에 아카이빙 공간을 만들었다. 가장 먼저 손님을 반기는 건 『시의전서』의 복제본이다. ⓒ순대실록
Chapter 4.순대 스테이크 : ‘재현’한다고 전통이 부활하는 게 아니다
순대 연구자로 거듭나서 세운 순대실록, 반응은 어땠을까요? 리브랜딩 초반에는 눈길을 끌지 못했다고 합니다. 대학로를 다니는 젊은 손님들은 여전히 순댓집을 외면했죠. 인근 대학생 100명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돌아온 답은 “냄새가 난다. 불량식품 같다”였다고 해요.
‘기존의 틀을 깨야 한다.’ 당시 육경희 대표의 가설이었다고 해요. 그래서 실험을 하기로 해요.
첫 실험은 2012년 5월. 철판순대볶음과 생맥주 세트를 내놨어요. 일명 ‘순맥’이었죠. 당시 직원들은 “순대는 무조건 소주 아니냐”고 반발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육 대표는 직관으로 실험을 밀어붙였어요. 매장 앞에 생맥주 냉장고를 놓고 ‘철판볶음 먹으면 맥주 한 잔 무료’ 행사를 열었죠. 결과는 어땠을까요? ‘순맥’ 매출이 순댓국을 넘어섰습니다. 하루 매출 300만원, 맥주가 잘 팔린 날은 1000만원까지 찍었어요.

순대실록의 순대곱창볶음. 육대표는 순대와 순댓국에 한정되어 있던 메뉴에서 벗어나, 순대볶음과 맥주를 매치해 젊은 손님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순대실록
작은 실험이 먹히는 걸 확인한 육 대표. 다음에는 연구에 기반한 실험을 이어갑니다. 여름이 지나자, 생맥주 찾는 이들이 줄었거든요. “종목을 빨리 바꿔야한다”는 직관에서 신메뉴를 개발해요.
2012년 9월, 육 대표는 순대실록의 대표 제품이 된 ‘순대 스테이크’를 만들었어요. 지금까지 약 100만 개가 팔린 제품이죠. 당시 육 대표는 이를 ‘구워 먹는, 젊은 순대’라 불렀어요.
물론 무턱대고 똑같은 순대를 구운 건 아녔어요. 순댓국에 들어가는 일반 순대를 구우면 겉이 터지거든요. 5개월 동안 속 재료를 바꿔가며 안 터질 때까지 구워봤대요. 결국 호두나 잣 같은 견과류를 잔뜩 넣자 구워도 터지지 않는다는 걸 발견했죠. 여기에 몸에 도움이 된다는 인식을 더하기 위해 흑미와 브로콜리, 표고버섯 등 27가지 재료를 채웠죠.
“순대와 브랜드를 살리려면 젊은 손님들이 줄을 서야만 했어요. 당연히 전통을 고집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현대에 맞는 게 뭘까 생각하다가 순대를 굽기까지 한 거였어요.”
반응은 어땠을까요? 생소한 메뉴다 보니 처음에는 하루에 몇 개만 팔리는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반전이 일어난 건 4개월 뒤인 2013년 1월, 순대실록이 한 방송에 소개되면서였어요. 손님이 구운 순대를 칼로 썰어 먹는 걸 본 방송인 사유리 씨가 “스테이크 같다”고 한 게 화제가 됐죠.
육 대표도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어요. 아예 메뉴 이름을 ‘젊은 순대’에서 ‘순대 스테이크’로 바꿨죠. 모호한 표현을 확실한 단어로 바꿔 부른 거예요. 이후 방송국에서 촬영 요청이 계속 밀려들었어요. 매출은 매일 1000만원을 넘겼어요. 매장 앞엔 늘 줄이 길게 늘어서게 됐죠.
“순대 스테이크는 업계에서도 화제가 돼 대기업에서도 비슷한 제품을 만들기도 했어요. 하지만 똑같이 따라 하진 못했죠. 재료만 27가지인 데다가, 굽기 전 찌고 불리고 삶는 과정이 촘촘하거든요. 허들을 높이고 나니, 이게 저만의 메뉴가 됐습니다.”

‘젊은 순대’라는 이름으로 출시되었던 순대 스테이크는 지금도 순대실록의 시그니처 요리이자 매출 상위 메뉴다. ⓒ순대실록
Chapter 5.공부와 실험에는 절대 마침표가 없다
육경희 대표는 순대실록을 안정 궤도에 올려둔 뒤에도 실험을 이어갔습니다. 새롭게 알아낸 전통 레시피를 되살리기도 하고, 시대 변화에 맞는 재료를 섞은 메뉴를 만들기도 하죠.
2015년에는 낮은 온도에서 부드럽게 익힌 ‘수비드순대’를, 2019년엔 ‘떡볶이순대’를 만들었어요. 2025년에는 찹쌀 대신 실곤약과 두부를 넣은 ‘라이트 순대 스테이크’를 내놨죠. “요즘의 젊은이들은 순대를 살찌는 음식으로 생각해 개발한 것”이라면서요.
육 대표는 이제 순대 공부의 영역을 세계로 넓히고 있습니다. 이탈리아로 가서는 현지 장인의 순대를 배우고, 스페인 부르고스의 돼지 도축 행사 ‘라 마탄사La Matanza’에도 찾아가 그곳만의 순대를 맛봤어요. 몽골에 가서는 유목민들이 양 내장을 다루는 법도 배웠죠.
이렇게 해서 어떤 변화를 만들었냐고요. 육 대표는 계속해서 새 메뉴를 기획했습니다. 예를 들어, 올해는 순대 안에 소고기와 소피, 잣, 건포도를 넣은 ‘소순대’를 만들었어요. 우리나라 밖에서는 순대나 소세지에 잣과 건포도를 넣더라는 겁니다. 그 입맛도 잡아보겠다는 취지였죠.
“사람들은 익숙해진 대로 움직이고 싶어 하잖아요? 하지만 저는 브랜드가 그렇게 되는 순간 끝난다고 생각해요. 다음이 뭔지 내다봐야 한다고 봅니다. 살아 움직이는 생물체처럼요.

세계를 돌아다니며 순대를 공부한 육 대표.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몽골과 이탈리아, 태국, 영국에서 현지의 순대를 배우고 있는 모습이다. ⓒ육경희
이제 그는 자신처럼 ‘내 브랜드’를 꿈꾸는 사람들을 키우기도 해요. 순대가 아닌 다른 음식을 끝까지 파고드는 사람들을 찾아 기회를 열어주고 있죠.
2013년 문을 연 이탈리아 피자집 ‘핏제리아오’와, 2022년 문을 연 중식당 ‘계향각’이 그 결과물입니다. 이탈리아 로마 피자 월드컵에서 1등을 차지한 이진형 셰프와, 청나라 요리 고서를 25년 연구한 신계숙 셰프가 각각 운영하고 있죠.
“사람들이 순대 브랜드하다가 왜 피자랑 중식을 하냐고 물어요. 제가 만들려는 게 아니라, ‘그 음식에 미쳐 있는 사람’을 만나서 기회를 만든 거예요. 셋이 앉아 이야기하다 보면 ‘우리는 왜 이러고 있지?’싶을 정도로 음식 이야기를 끝없이 해요.”
‘열정이 아니라 목표와 이유를 좇는 삶.’ 지금의 육 대표를 설명하는 말이라 생각했습니다. 한 번 더 물었어요. 내 일의 이유와 목표를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요.
“내 일의 이유를 만드는 건 결국 ‘이해’라고 생각해요. 저는 순대를 깊이 공부하면서 이해했을 때, 왜 내가 이 브랜드를 계속해야 하는지 이유를 찾았어요. 그때부터는 일이 즐거움으로 바뀌었죠.

육경희 대표는 “여전히 순대는 파고들 구석이 많다”고 말한다. 지금까지는 순대의 과거와 현재를 만들어 왔다면, 이제는 미래를 만들어갈 차례라는 그. 그는 순대의 다음 모습을 그리며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