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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리오 : ‘인텔리젠시아 드리퍼’로 소문난 유리 브랜드의 100년 생존기

한이룸

이커머스

2025. 1. 15.

Chapter 1.실험용 비커를 비틀어, 사이폰 커피에 뛰어들다

하리오가 유리 제조사로만 남지 않았던 건, 이들의 ‘변화 대응 DNA’ 덕분이에요. 창업자부터가 시대를 기민하게 읽는 사람이거든요.

하리오가 출발한 1921년, 일본의 연구 기관들은 화학 연구에 필요한 비커, 플라스크를 찾고 있었어요. 실험을 견딜 ‘열에 강한’ 유리로 만든 제품을요.

유리 공방 주인이었던 시바타 히로무柴田弘는 재빨리 ‘내열 유리’를 만드는 데에 올인했어요. 그 뒤 연구 기관에 연락해 비커 같은 연구 용품을 납품했죠.

20년 뒤 시바타는 또 한번의 변화를 만들어요. 1940년대부터 일본 전역에 커피 마시는 문화가 퍼졌거든요. 마침 미군들이 카페에서 “사이폰* 없냐”고 수소문하던 모습을 목격했죠.

  • 사이폰은 증기압을 이용해 커피를 내릴 때 쓰는 기구이다. 알코올램프, 플라스크 등을 연결한 모습이다. 진공 상태로 추출된 커피라 원두 본연의 맛과 향이 가장 잘 유지된다.

“창업자는 여기서 기회를 포착했어요. 화학 실험용 비커를 만들던 걸 조금만 비틀면, 사이폰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본 거죠. 20년 넘게 쌓은 ‘내열 유리’ 기술을 활용할 더 큰 시장을 발견한 겁니다.”_츠지모토 마리 하리오 홍보 담당자, 2022년 리크루트 인터뷰에서

하리오가 생산하는 사이폰 제품 중 하나. 비커에 플라스크를 이어 붙인 듯한 형태로, 증기를 이용해 원두를 적셔 커피를 추출한다. ⓒHARIO

만드는 건 어렵지 않았어요. 사이폰 모양이 비커와 비슷했거든요. 온도가 올라 끓는 물이 수증기가 돼 떠오르면, 그 물로 커피 가루를 희석해 커피를 추출하는 식이었죠.

사이폰을 취급하자, 하리오는 자연스레 D2C 회사가 됐어요.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사이폰의 내구력과 규격을 알아야 했으니까요. 33년째 하리오에 몸담은 장윤종 하리오코리아 지사장은, 이때를 ‘회사의 중요한 전환점’이라 말했습니다.

“(사이폰을 만든 시점부터) 개발부터 판매까지 직접 맡는 브랜드가 된 거예요. 다른 제조사처럼 물건만 만든 후, 납품업자를 기다리기만 했다면 결코 지금의 하리오가 되지 못했을 겁니다.”_장윤종 하리오코리아 지사장, 롱블랙 인터뷰에서

커피 시장에 한번 발을 담그니, 시바타의 눈에 내열 유리의 잠재력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1960년대엔 가정용 보리차 포트를 내놓았죠. 당시엔 다 끓인 보리차를 식힌 뒤 맥주병에 보관하곤 했거든요. 차라리 내열 유리로 입구가 넓은 포트를 만든다면? 뜨거운 차를 편히 부을 수 있겠다 생각한 거죠.

보리차 포트는 하리오의 히트 상품이 됐어요. 감 잡은 시바타. 그 뒤 전자레인지용 조리 기구까지 내놓으며. 내열 유리로 만들 수 있는 가정용품은 다 만들었죠.

“(우리의 장점인) 내열 유리를 고집하되, 거기에 얽매이지 않는 게 원칙이었습니다. 그래서 차 포트나 전자레인지용 조리 기구처럼, 시대에 맞게 받아들여질 제품을 찾아 대응해 왔어요.”_츠지모토 마리 하리오 홍보 담당자, 2022년 리크루트 인터뷰에서

하리오의 초창기 홍보용 포스터. 주로 연구기관에 내열 유리로 만든 실험용 도구를 납품하는 B2B 회사였다. ⓒHARIO

Chapter 2.‘물줄기 속도’를 바꿔, 업계의 관행에 도전하다

여기까진 다 옛날 얘기. 하리오를 2025년 지금까지 살아있게 만든 제품은 다름 아닌 ‘V60 드리퍼’예요. 2005년 세상에 나왔죠. 세계 최초 핸드드립 전용 카페를 연 인텔리젠시아가 써 주목받은 제품이기도 해요.

V60은 이름 그대로 60도로 기울어진 V자 원뿔 형태의 드리퍼예요. 이 드리퍼 위에 종이 필터를 올리고, 곱게 간 커피 가루를 올리는 게 드립커피 만들기의 시작이죠. 그다음 주전자로 뜨거운 물을 위에서부터 천천히 부어 커피를 내리면 끝.

근데 왜 하필 V60가 인기를 얻었냐고요? 커피 전문가의 말을 들어볼까요. 서울 마포구에서 15년째 이미커피를 운영 중인 이림 대표가 말해요. “기존 드리퍼의 방식을 살짝 비틀었다”라고요.

“하리오의 드리퍼는 시중에 나온 커피용품의 전형을 깼어요. 기존 드리퍼와 달리 다양한 맛을 내게 했거든요. 과거엔 좁은 구멍으로 커피를 천천히 추출했다면, 하리오의 넓고 경사진 구멍은 물줄기를 마음껏 조절해 내 입맛에 맞는 커피를 내릴 수 있죠.”_이림 이미커피 대표, 롱블랙 인터뷰에서

아직은 어려워요. 드리퍼 모양이 커피 맛이랑 무슨 상관일까요? 이림 대표는 말해요. “커피 원두가 뜨거운 물에 오래 잠겨있을수록 쓴맛이 올라온다”라고요. 반면 향긋한 산미는 물을 부은 지 얼마 안 될 때 살아있다는 거예요.

과거의 드리퍼는 사다리꼴 모양에, 커피가 흘러내리는 구멍의 크기가 작았어요. 물에 오래 적셔 묵직하고 깊은 커피를 즐기던 문화였거든요. 드리퍼도 여기에 맞춰 물이 천천히 내려가게 만든 거예요.

다시 말해 많은 드리퍼가 ‘당대의 커피 트렌드’에 맞춰왔다는 거죠. 그런데 하리오는 왜 트렌드를 거스른 드리퍼를 내놓은 걸까요? 장윤종 지사장이 설명했어요.

“1990년대 후반부터 스페셜티 커피 문화*가 조금씩 유행하고 있었어요. 원두를 어떻게 볶고 내리냐에 따라 맛이 다르단 걸, 사람들이 알기 시작했거든요. 하지만 시중의 드리퍼는 그 요구에 잘 맞진 않았어요. 그래서 하리오는 사람들이 취향껏 맛을 낼 자유도 높은 드리퍼를 개발해 보기로 한 겁니다.”_장윤종 하리오코리아 지사장, 롱블랙 인터뷰에서*스페셜티 커피란 원두의 산지마다 각각 다른 기후와 토양에 따라 독특한 맛과 향을 품은 커피를 뜻한다. 따라서 스페셜티 커피 문화란 원두의 산지부터 꼼꼼히 따져, 다양한 취향의 커피를 만들고 향유하는 걸 의미한다.

새 드리퍼는 기존 제품을 아주 살짝만 바꾸면 됐어요. 하리오는 드리퍼를 원뿔 모양으로 만들어 급경사를 만들고, 커피가 흘러내리는 구멍의 크기도 좀 더 키웠죠.

그럼 선택지가 넓어져요. 드리퍼 가장자리에 천천히 물을 부어 일부러 진한 농도를 만들 수도, 가운데에 빠르게 부어 산미만 살릴 수도 있죠.

“(우리는) 물을 붓는 속도에 따라 커피 맛을 조절할 수 있는데 주목했습니다. 물론 누구에게나 같은 맛을 내길 원하는 카페 입장에선 부적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맛을 내길 원하는 이들도 분명히 있죠. 이들을 위한 제품을 만들고 싶었습니다.”_시바타 료보 하리오 부사장, 2023년 NICHIGO PRESS 인터뷰에서

Chapter 3.비틀고 변주한 끝에, 선택받는 존재가 되다

V60을 가장 먼저 알아본 건 바리스타 챔피언들이었어요. 2007년, 일본 도쿄에서 월드 바리스타 챔피언십WBC이 열려 전 세계의 바리스타들이 일본에 들어왔거든요.

그 대회의 우승자, 영국에서 온 제임스 호프먼James Hoffman이 V60을 발견했어요. “다른 드리퍼로는 구현하기 어려운 커피 맛을 낸다”며 주변에 알렸죠. 그를 따르는 바리스타들이 한 명씩 따라 하기 시작했고요*.

  • 2008년 WBC 우승자 스테판 모리세이Stephen Morrissey, 2010년 우승자 마이클 필립스Michael Philips 등이 연이어 V60를 사용했다.

유명 카페들도 V60 드리퍼를 들이기 시작했어요. 2009년 스텔스 스타벅스Stealth Starbucks*, 2010년엔 인텔리젠시아 커피까지 하리오의 고객이 된 거예요.

  • 스텔스 스타벅스란, 스타벅스라는 브랜드명이 없는 ‘스타벅스의 실험실’ 같은 카페이다. 2009년부터 스타벅스에서 시도하지 못하는 커피 메뉴와 서비스, 디자인 등을 실험하고 있다.

“‘드립 커피용품=하리오’라는 공식이 성립되던 때였어요. 서양의 유명 바리스타들이 핸드드립 문화를 V60 드리퍼로 접한 게 퍼지다 보니 그렇게 된 거죠. 해외의 카페들은 메뉴판에 드립 커피 대신 ‘하리오 커피’라고 쓸 정도였고요.타이밍도 좋았어요. 하리오는 2005년 플라스틱 소재의 드리퍼로 시작해, 4년간 세라믹부터 내열유리까지 틈틈이 만들어뒀거든요. 큰 인기가 없었는데도요. 하지만 수요가 없다며 개발을 게을리했다면, 이정도 인기는 얻지 못했을 겁니다. 바리스타들은 소재의 차이까지 섬세히 따지니까요.”_장윤종 하리오코리아 지사장, 롱블랙 인터뷰에서

인텔리젠시아가 공개적으로 추천한 하리오 V60 드리퍼 모습. 홈페이지엔 “꾸준히 우리를 놀라게 했다”며 추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인텔리젠시아 홈페이지

Chapter 4.팬덤을 얻은 뾰족한 제품이, 대중에게 다가가는 법

사실 미국발 하리오 드리퍼 열풍은 예상 밖의 일이었어요. 하지만 그다음이 중요해요. 하리오가 굴러들어 온 기회를 잡아, 제품을 ‘스테디셀러’로 키웠거든요.

“사람들이 SNS나, 유튜브를 보고 하리오 제품을 찾았습니다. 별도로 홍보비를 쓰지 않아도 될 정도였죠. ‘바리스타들이 애용하는 제품’으로 이미지를 얻은 덕이었어요. (…)동시에 우린 다른 고민을 시작했습니다. 프로가 쓰는 제품이란 이미지를 넘어, 비전문가에게도 어떻게 스며들게 할지를요. 그게 성장의 열쇠라 본 거죠.”_우노 료헤이 하리오 사장, 2017년 라이트하우스 인터뷰에서

먼저 하리오는 그들의 가장 열성팬인 바리스타와 손을 잡았어요. 하리오 드리퍼로 대회에서 우승한 바리스타가 나오면, 이들을 곧장 ‘하리오 앰배서더’로 임명했죠. 그 뒤 유튜브 채널을 통해 소개했어요. 어떤 방법으로 커피를 내리는지 레시피 공유하듯 알려줬죠.

하리오가 ‘드립 커피 레시피’를 전하는 이유는 단순해요. 바로 ‘대중적인 브랜드’가 되려는 것. 드립 커피가 결코 고수들만의 영역이 아니라는 걸 알리는 거죠.

2016년 월드 브루어스 컵 우승자이자 하리오 앰버서더인 테츠 카스야가 자신의 유튜브에 올린 ‘궁극의 레시피’ 영상 일부. 하리오의 신제품 ‘하리오 스위치’를 쓴 이 영상은 무려 84만 명이 봤다. ⓒTETSU KASUYA World Brewers Cup Champion 계정 유튜브

가장 강력한 제안은, 소비자 얼굴을 마주하는 것

커피 좋아하는 사람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곳이 어딜까요? 맞아요. 카페죠! 하리오는 잠재적 소비자를 만나고 싶어, 2018년부터 카페 사업을 시작해요. 맨 먼저 도쿄 니혼바시日本橋에 ‘하리오 카페HARIO Cafe’를 열었죠*.

  • 현재는 니혼바시 카페를 포함해 교토, 나고야 등 5곳에 카페를 운영 중이다.

경험 연계가 꽤 자연스러워요. 3층짜리 건물을 매입해 2층에 카페를, 3층 하리오 제품을 진열한 쇼룸을 뒀거든요. 1층엔 하리오의 새 유리 액세서리 브랜드인 ‘램프워크 팩토리Lampwork Factory’도 소개하고요.

카페는 일부러 ‘오픈 주방’으로 설계했어요. 메뉴를 고르면, 바리스타가 곧장 커피를 내리죠. 심지어 사이폰 커피를 주문하면, 쟁반에 사이폰 커피 기구와 잔이 함께 담겨 나와요. 커피가 담긴 둥근 내열유리 포트를 잔에 따라 마시게 하죠.

고객이 커피를 다 마셨다면? 하리오는 이때를 놓치지 않아요. “맛있게 마셨다”는 고객에게 “워크숍에 오면 이런 커피 내리는 법을 배울 수 있다”고 제안하죠. 커피 전문가가 ‘나만의 레시피’를 찾게 도와준다면서요.

주력 제품 판매와 제품 경험, 색다른 경험으로 연계까지. 하리오는 플래그십 스토어처럼 힘을 주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브랜드를 경험하게 한 거예요.

“사용자와 대면할 기회를 만드는 게 중요했어요. 카페는 단순히 수익을 내려고 연 게 아닙니다. 고객들에게 제품의 특징과 사용법도 알리고, 그들의 목소리도 듣는 자리이죠.”_장윤종 하리오코리아 지사장, 롱블랙 인터뷰에서

니혼바시의 하리오 카페 내부 모습. 바리스타가 하리오의 제품을 사용해서 커피를 내리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있게 내부 인테리어에 신경 썼다. ⓒHARIO

Chapter 5.히트 상품과 기업 본질을 헷갈리지 말라

이젠 하리오를 ‘커피용품 브랜드’로 아는 사람이 많아요. 그런데 경영진은 다르게 생각합니다. “우리의 본질은 여전히 내열 유리”라고요. 커피용품은 시대를 잘 만난 히트 상품에 불과하다는 거죠.

이유가 뭘까요? 아무리 하리오가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했어도, 언제까지나 ‘내열 유리를 다룬다’는 근본을 기억했기에 생존할 수 있었단 거예요. 사이폰부터 보리차 포트, 드리퍼 모두 모양 변형이 쉬운 내열 유리의 특성을 이해한 덕에 탄생했으니까요.

하리오의 경영진이 시대 불문하고 ‘유리 장인’ 지키기에 전력을 다하는 이유예요. 사실 뜨겁고 무거운 유리를 다루는 일은, 젊은 세대로 갈수록 점점 기피됐거든요. 1990년대부터 하리오의 1세대 유리 장인들이 은퇴하기 시작하면서, 한때 인력난을 겪기도 했죠.

“제가 하리오에 들어올 무렵인 1995년, 아버지와 함께한 장인들이 하나둘 떠났어요. 수공 유리 시대가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공장을 보며, 이 기술을 버려서는 안 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기술 계승과 향상을 목표로 새로운 프로젝트에 나섰죠.”_시바타 야스히로柴田保弘* 하리오 회장, 2024년 AAR Japan 인터뷰에서*3대 하리오 회장으로 창업자인 시바타 히로무의 셋째 아들이다. 1995년에 하리오에 합류했다.

어려움을 돌파한 건, 다름 아닌 ‘세계 최초의 유리 바이올린 만들기’ 프로젝트였어요. 내열 유리의 유연함과 아름다움을 보여주려는 극한의 작업이었죠. 약 20개의 시제품을 만들고 깨뜨린 끝에, 2003년 두 개의 유리 바이올린을 만드는 데 성공했어요.

덕분에 ‘유리로 뭐든 도전하는 곳’ 하면 하리오를 떠올릴 수 있게 됐어요. 동시에 유리 장인들이 계속 찾아와 명맥을 잇는 곳이 됐죠.

“유리 바이올린을 만든 뒤, 장인들은 ‘불가능하다’는 태도를 버릴 수 있었어요. 젊은 사람들의 눈길도 끌었죠. 그 덕에 이제 일본에서 살아남은 내열 유리 공장은 우리뿐입니다.

하리오가 2003년 공개한 유리 바이올린 모습. 이후에도 첼로, 기타 등을 만드는 데 도전해 성공했다. ⓒHARIO

하리오 : ‘인텔리젠시아 드리퍼’로 소문난 유리 브랜드의 100년 생존기

Chapter 1.실험실의 유리가 커피 잔으로: 하리오의 시작

1921년 어느 날, 일본 도쿄의 작은 유리 공방에서 한 장인이 붉게 달궈진 유리를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실험실용 비커를 만들던 그의 이름은 시바타 히로무. 그는 당시 일본 연구소들이 간절히 원하던 '열에 강한 유리'의 비밀을 찾아내려 했죠.

전후 일본의 실험실들은 고온에서도 깨지지 않는 비커와 플라스크가 절실했어요. 하지만 이런 '내열 유리' 제품은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죠. 시바타는 여기서 기회를 봤습니다. "우리도 만들 수 있다"고요.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시바타는 마침내 성공했어요. 그가 만든 내열 유리는 곧 연구소의 필수품이 됐죠. 하지만 시바타의 진가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어요. 그는 실험실 너머의 가능성을 보고 있었거든요.

20년 뒤 시바타는 또 한번의 변화를 만들어요. 1940년대부터 일본 전역에 커피 마시는 문화가 퍼졌거든요. 마침 미군들이 카페에서 “사이폰* 없냐”고 수소문하던 모습을 목격했죠.

  • 사이폰은 증기압을 이용해 커피를 내릴 때 쓰는 기구이다. 알코올램프, 플라스크 등을 연결한 모습이다. 진공 상태로 추출된 커피라 원두 본연의 맛과 향이 가장 잘 유지된다.

“창업자는 여기서 기회를 포착했어요. 화학 실험용 비커를 만들던 걸 조금만 비틀면, 사이폰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본 거죠. 20년 넘게 쌓은 ‘내열 유리’ 기술을 활용할 더 큰 시장을 발견한 겁니다.”_츠지모토 마리 하리오 홍보 담당자, 2022년 리크루트 인터뷰에서

!https://longblack-contens.s3.ap-northeast-2.amazonaws.com/image/20250115/17369528043d047b112a2cf92f4951dd82954b17b8.jpeg

하리오가 생산하는 사이폰 제품 중 하나. 비커에 플라스크를 이어 붙인 듯한 형태로, 증기를 이용해 원두를 적셔 커피를 추출한다. ⓒHARIO

만드는 건 어렵지 않았어요. 사이폰 모양이 비커와 비슷했거든요. 온도가 올라 끓는 물이 수증기가 돼 떠오르면, 그 물로 커피 가루를 희석해 커피를 추출하는 식이었죠.

사이폰을 취급하자, 하리오는 자연스레 D2C 회사가 됐어요.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사이폰의 내구력과 규격을 알아야 했으니까요. 33년째 하리오에 몸담은 장윤종 하리오코리아 지사장은, 이때를 ‘회사의 중요한 전환점’이라 말했습니다.

“(사이폰을 만든 시점부터) 개발부터 판매까지 직접 맡는 브랜드가 된 거예요. 다른 제조사처럼 물건만 만든 후, 납품업자를 기다리기만 했다면 결코 지금의 하리오가 되지 못했을 겁니다.”_장윤종 하리오코리아 지사장, 롱블랙 인터뷰에서

커피 시장에 한번 발을 담그니, 시바타의 눈에 내열 유리의 잠재력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1960년대엔 가정용 보리차 포트를 내놓았죠. 당시엔 다 끓인 보리차를 식힌 뒤 맥주병에 보관하곤 했거든요. 차라리 내열 유리로 입구가 넓은 포트를 만든다면? 뜨거운 차를 편히 부을 수 있겠다 생각한 거죠.

보리차 포트는 하리오의 히트 상품이 됐어요. 감 잡은 시바타. 그 뒤 전자레인지용 조리 기구까지 내놓으며. 내열 유리로 만들 수 있는 가정용품은 다 만들었죠.

“(우리의 장점인) 내열 유리를 고집하되, 거기에 얽매이지 않는 게 원칙이었습니다. 그래서 차 포트나 전자레인지용 조리 기구처럼, 시대에 맞게 받아들여질 제품을 찾아 대응해 왔어요.”_츠지모토 마리 하리오 홍보 담당자, 2022년 리크루트 인터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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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리오의 초창기 홍보용 포스터. 주로 연구기관에 내열 유리로 만든 실험용 도구를 납품하는 B2B 회사였다. ⓒHARIO

Chapter 2.‘물줄기 속도’를 바꿔, 업계의 관행에 도전하다

여기까진 다 옛날 얘기. 하리오를 2025년 지금까지 살아있게 만든 제품은 다름 아닌 ‘V60 드리퍼’예요. 2005년 세상에 나왔죠. 세계 최초 핸드드립 전용 카페를 연 인텔리젠시아가 써 주목받은 제품이기도 해요.

V60은 이름 그대로 60도로 기울어진 V자 원뿔 형태의 드리퍼예요. 이 드리퍼 위에 종이 필터를 올리고, 곱게 간 커피 가루를 올리는 게 드립커피 만들기의 시작이죠. 그다음 주전자로 뜨거운 물을 위에서부터 천천히 부어 커피를 내리면 끝.

근데 왜 하필 V60가 인기를 얻었냐고요? 커피 전문가의 말을 들어볼까요. 서울 마포구에서 15년째 이미커피를 운영 중인 이림 대표가 말해요. “기존 드리퍼의 방식을 살짝 비틀었다”라고요.

“하리오의 드리퍼는 시중에 나온 커피용품의 전형을 깼어요. 기존 드리퍼와 달리 다양한 맛을 내게 했거든요. 과거엔 좁은 구멍으로 커피를 천천히 추출했다면, 하리오의 넓고 경사진 구멍은 물줄기를 마음껏 조절해 내 입맛에 맞는 커피를 내릴 수 있죠.”_이림 이미커피 대표, 롱블랙 인터뷰에서

아직은 어려워요. 드리퍼 모양이 커피 맛이랑 무슨 상관일까요? 이림 대표는 말해요. “커피 원두가 뜨거운 물에 오래 잠겨있을수록 쓴맛이 올라온다”라고요. 반면 향긋한 산미는 물을 부은 지 얼마 안 될 때 살아있다는 거예요.

과거의 드리퍼는 사다리꼴 모양에, 커피가 흘러내리는 구멍의 크기가 작았어요. 물에 오래 적셔 묵직하고 깊은 커피를 즐기던 문화였거든요. 드리퍼도 여기에 맞춰 물이 천천히 내려가게 만든 거예요.

다시 말해 많은 드리퍼가 ‘당대의 커피 트렌드’에 맞춰왔다는 거죠. 그런데 하리오는 왜 트렌드를 거스른 드리퍼를 내놓은 걸까요? 장윤종 지사장이 설명했어요.

“1990년대 후반부터 스페셜티 커피 문화가 조금씩 유행하고 있었어요. 원두를 어떻게 볶고 내리냐에 따라 맛이 다르단 걸, 사람들이 알기 시작했거든요. 하지만 시중의 드리퍼는 그 요구에 잘 맞진 않았어요. 그래서 하리오는 사람들이 취향껏 맛을 낼 자유도 높은 드리퍼를 개발해 보기로 한 겁니다.”_장윤종 하리오코리아 지사장, 롱블랙 인터뷰에서스페셜티 커피란 원두의 산지마다 각각 다른 기후와 토양에 따라 독특한 맛과 향을 품은 커피를 뜻한다. 따라서 스페셜티 커피 문화란 원두의 산지부터 꼼꼼히 따져, 다양한 취향의 커피를 만들고 향유하는 걸 의미한다.

새 드리퍼는 기존 제품을 아주 살짝만 바꾸면 됐어요. 하리오는 드리퍼를 원뿔 모양으로 만들어 급경사를 만들고, 커피가 흘러내리는 구멍의 크기도 좀 더 키웠죠.

그럼 선택지가 넓어져요. 드리퍼 가장자리에 천천히 물을 부어 일부러 진한 농도를 만들 수도, 가운데에 빠르게 부어 산미만 살릴 수도 있죠.

“(우리는) 물을 붓는 속도에 따라 커피 맛을 조절할 수 있는데 주목했습니다. 물론 누구에게나 같은 맛을 내길 원하는 카페 입장에선 부적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맛을 내길 원하는 이들도 분명히 있죠. 이들을 위한 제품을 만들고 싶었습니다.”_시바타 료보 하리오 부사장, 2023년 NICHIGO PRESS 인터뷰에서

!https://longblack-contens.s3.ap-northeast-2.amazonaws.com/image/20250115/17369388704b1bb0eb1f58ba203bfbf60962a2eb89.png

Chapter 3.비틀고 변주한 끝에, 선택받는 존재가 되다

V60을 가장 먼저 알아본 건 바리스타 챔피언들이었어요. 2007년, 일본 도쿄에서 월드 바리스타 챔피언십WBC이 열려 전 세계의 바리스타들이 일본에 들어왔거든요.

그 대회의 우승자, 영국에서 온 제임스 호프먼James Hoffman이 V60을 발견했어요. “다른 드리퍼로는 구현하기 어려운 커피 맛을 낸다”며 주변에 알렸죠. 그를 따르는 바리스타들이 한 명씩 따라 하기 시작했고요*.

  • 2008년 WBC 우승자 스테판 모리세이Stephen Morrissey, 2010년 우승자 마이클 필립스Michael Philips 등이 연이어 V60를 사용했다.

유명 카페들도 V60 드리퍼를 들이기 시작했어요. 2009년 스텔스 스타벅스Stealth Starbucks*, 2010년엔 인텔리젠시아 커피까지 하리오의 고객이 된 거예요.

  • 스텔스 스타벅스란, 스타벅스라는 브랜드명이 없는 ‘스타벅스의 실험실’ 같은 카페이다. 2009년부터 스타벅스에서 시도하지 못하는 커피 메뉴와 서비스, 디자인 등을 실험하고 있다.

“‘드립 커피용품=하리오’라는 공식이 성립되던 때였어요. 서양의 유명 바리스타들이 핸드드립 문화를 V60 드리퍼로 접한 게 퍼지다 보니 그렇게 된 거죠. 해외의 카페들은 메뉴판에 드립 커피 대신 ‘하리오 커피’라고 쓸 정도였고요.타이밍도 좋았어요. 하리오는 2005년 플라스틱 소재의 드리퍼로 시작해, 4년간 세라믹부터 내열유리까지 틈틈이 만들어뒀거든요. 큰 인기가 없었는데도요. 하지만 수요가 없다며 개발을 게을리했다면, 이정도 인기는 얻지 못했을 겁니다. 바리스타들은 소재의 차이까지 섬세히 따지니까요.”_장윤종 하리오코리아 지사장, 롱블랙 인터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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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텔리젠시아가 공개적으로 추천한 하리오 V60 드리퍼 모습. 홈페이지엔 “꾸준히 우리를 놀라게 했다”며 추천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인텔리젠시아 홈페이지

Chapter 4.팬덤을 얻은 뾰족한 제품이, 대중에게 다가가는 법

사실 미국발 하리오 드리퍼 열풍은 예상 밖의 일이었어요. 하지만 그다음이 중요해요. 하리오가 굴러들어 온 기회를 잡아, 제품을 ‘스테디셀러’로 키웠거든요.

“사람들이 SNS나, 유튜브를 보고 하리오 제품을 찾았습니다. 별도로 홍보비를 쓰지 않아도 될 정도였죠. ‘바리스타들이 애용하는 제품’으로 이미지를 얻은 덕이었어요. (…)동시에 우린 다른 고민을 시작했습니다. 프로가 쓰는 제품이란 이미지를 넘어, 비전문가에게도 어떻게 스며들게 할지를요. 그게 성장의 열쇠라 본 거죠.”_우노 료헤이 하리오 사장, 2017년 라이트하우스 인터뷰에서

먼저 하리오는 그들의 가장 열성팬인 바리스타와 손을 잡았어요. 하리오 드리퍼로 대회에서 우승한 바리스타가 나오면, 이들을 곧장 ‘하리오 앰배서더’로 임명했죠. 그 뒤 유튜브 채널을 통해 소개했어요. 어떤 방법으로 커피를 내리는지 레시피 공유하듯 알려줬죠.

하리오가 ‘드립 커피 레시피’를 전하는 이유는 단순해요. 바로 ‘대중적인 브랜드’가 되려는 것. 드립 커피가 결코 고수들만의 영역이 아니라는 걸 알리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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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월드 브루어스 컵 우승자이자 하리오 앰버서더인 테츠 카스야가 자신의 유튜브에 올린 ‘궁극의 레시피’ 영상 일부. 하리오의 신제품 ‘하리오 스위치’를 쓴 이 영상은 무려 84만 명이 봤다. ⓒTETSU KASUYA World Brewers Cup Champion 계정 유튜브

가장 강력한 제안은, 소비자 얼굴을 마주하는 것

커피 좋아하는 사람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곳이 어딜까요? 맞아요. 카페죠! 하리오는 잠재적 소비자를 만나고 싶어, 2018년부터 카페 사업을 시작해요. 맨 먼저 도쿄 니혼바시日本橋에 ‘하리오 카페HARIO Cafe’를 열었죠*.

  • 현재는 니혼바시 카페를 포함해 교토, 나고야 등 5곳에 카페를 운영 중이다.

경험 연계가 꽤 자연스러워요. 3층짜리 건물을 매입해 2층에 카페를, 3층 하리오 제품을 진열한 쇼룸을 뒀거든요. 1층엔 하리오의 새 유리 액세서리 브랜드인 ‘램프워크 팩토리Lampwork Factory’도 소개하고요.

카페는 일부러 ‘오픈 주방’으로 설계했어요. 메뉴를 고르면, 바리스타가 곧장 커피를 내리죠. 심지어 사이폰 커피를 주문하면, 쟁반에 사이폰 커피 기구와 잔이 함께 담겨 나와요. 커피가 담긴 둥근 내열유리 포트를 잔에 따라 마시게 하죠.

고객이 커피를 다 마셨다면? 하리오는 이때를 놓치지 않아요. “맛있게 마셨다”는 고객에게 “워크숍에 오면 이런 커피 내리는 법을 배울 수 있다”고 제안하죠. 커피 전문가가 ‘나만의 레시피’를 찾게 도와준다면서요.

주력 제품 판매와 제품 경험, 색다른 경험으로 연계까지. 하리오는 플래그십 스토어처럼 힘을 주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브랜드를 경험하게 한 거예요.

“사용자와 대면할 기회를 만드는 게 중요했어요. 카페는 단순히 수익을 내려고 연 게 아닙니다. 고객들에게 제품의 특징과 사용법도 알리고, 그들의 목소리도 듣는 자리이죠.”_장윤종 하리오코리아 지사장, 롱블랙 인터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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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혼바시의 하리오 카페 내부 모습. 바리스타가 하리오의 제품을 사용해서 커피를 내리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있게 내부 인테리어에 신경 썼다. ⓒHARIO

Chapter 5.히트 상품과 기업 본질을 헷갈리지 말라

이젠 하리오를 ‘커피용품 브랜드’로 아는 사람이 많아요. 그런데 경영진은 다르게 생각합니다. “우리의 본질은 여전히 내열 유리”라고요. 커피용품은 시대를 잘 만난 히트 상품에 불과하다는 거죠.

이유가 뭘까요? 아무리 하리오가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했어도, 언제까지나 ‘내열 유리를 다룬다’는 근본을 기억했기에 생존할 수 있었단 거예요. 사이폰부터 보리차 포트, 드리퍼 모두 모양 변형이 쉬운 내열 유리의 특성을 이해한 덕에 탄생했으니까요.

하리오의 경영진이 시대 불문하고 ‘유리 장인’ 지키기에 전력을 다하는 이유예요. 사실 뜨겁고 무거운 유리를 다루는 일은, 젊은 세대로 갈수록 점점 기피됐거든요. 1990년대부터 하리오의 1세대 유리 장인들이 은퇴하기 시작하면서, 한때 인력난을 겪기도 했죠.

“제가 하리오에 들어올 무렵인 1995년, 아버지와 함께한 장인들이 하나둘 떠났어요. 수공 유리 시대가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공장을 보며, 이 기술을 버려서는 안 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기술 계승과 향상을 목표로 새로운 프로젝트에 나섰죠.”_시바타 야스히로柴田保弘* 하리오 회장, 2024년 AAR Japan 인터뷰에서*3대 하리오 회장으로 창업자인 시바타 히로무의 셋째 아들이다. 1995년에 하리오에 합류했다.

어려움을 돌파한 건, 다름 아닌 ‘세계 최초의 유리 바이올린 만들기’ 프로젝트였어요. 내열 유리의 유연함과 아름다움을 보여주려는 극한의 작업이었죠. 약 20개의 시제품을 만들고 깨뜨린 끝에, 2003년 두 개의 유리 바이올린을 만드는 데 성공했어요.

덕분에 ‘유리로 뭐든 도전하는 곳’ 하면 하리오를 떠올릴 수 있게 됐어요. 동시에 유리 장인들이 계속 찾아와 명맥을 잇는 곳이 됐죠.

“유리 바이올린을 만든 뒤, 장인들은 ‘불가능하다’는 태도를 버릴 수 있었어요. 젊은 사람들의 눈길도 끌었죠. 그 덕에 이제 일본에서 살아남은 내열 유리 공장은 우리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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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리오가 2003년 공개한 유리 바이올린 모습. 이후에도 첼로, 기타 등을 만드는 데 도전해 성공했다. ⓒHARIO